시간의 틈 사이로 흘려보내는 바스라지는 기억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를 보고

by 달고래

얼마전 있던 독서모임에서 요즘 날씨와 계절 얘기가 나와서 한 친구가 1월에 러브레터가 재개봉한다고 알려줬다. 아 오겡끼데스까 그 영화?ㅋㅋ 이렇게 얘기했는데 친구가 영화를 다 보면 그 장면이 그렇게 가볍게 다가오지 않을거라고 얘기해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방학을 맞이하여 평일 오전에 느긋하게 관람하는 사치를 부려봤다. 일부러 아무런 정보 없이 로맨스 영화라고만 알고 갔는데 보는 동안 요즘 나를 둘러싼 세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야기가 계속 머리와 마음을 스쳐지나갔다.


영화를 보고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러브레터는 '흘려보냄'의 이야기인 듯 하다.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흘려보내고, 결코 다시 돌아가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과거의 순간도 흘려보내는.


다 흘려보내고 나면 남은게 없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고 어려워서, 그래서 사람들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계속 붙들려고 애쓰거나 아예 감쪽같이 잊어버리는데 집착하는 듯 하다. 히로코와 그녀의 펜팔친구 이츠키는 전자에 가깝고, 히로코의 현재 연인 아키바, 이츠키의 엄마와 할아버지는 후자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도 실은 잊으려고 무던히 노력할 뿐, 실제로는 깔끔하게 그 기억을 도려낼 수 있을정도로 무심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키바는 후배 이츠키가 마지막 조난되던 순간 불렀던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를 여전히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으며, 이츠키의 엄마와 할아버지는 이츠키의 아빠가 사경을 헤매던 그 때의 1분1초를 모조리 기억하고 이츠키를 그녀의 아빠처럼 허망하게 보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대개의 사람은 이토록 연약하다. 사람을 잃은 상흔에서 곧바로 무심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히로코는 잘 지내고 있냐는 간절한 바람같은 물음과 나는 잘 지내고 있다는 다짐같은 대답을 통해 마침내 옛 연인을 조금씩 놓아주기 시작한다. 그런 히로코의 모습을 가장 중요한 때라고 설명하는 아키바의 말이 없어도 지켜보는 우리는 안다. 그녀가 옛 연인을 놓아주기 시작하는 그 일은 비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풋풋한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특별한 인연을 뒤늦게야 깨닫게 된 이츠키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그와 되돌릴 수 없는 그 때의 추억을 잘 흘려보내줄 것이다. 내내 달고살던 심한 감기에서 나았듯이 뒤늦게 그녀의 마음에 얹힌 추억의 무게도 부피감은 남아도 언젠가는 가벼워질 것이다.


작년 12월과 지금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울만큼 우리는 모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다그치지 않고 기억과 추억이 스르르 바스러지는 그 감각들을 천천히 시간의 틈 사이로 흘려보내고 느끼길 바란다. 그렇게 흘려보내고 남은 가루를 차곡차곡 쌓아 만든 단단하고 도타운 마음으로 조금 더 의연해지고 서로를 위로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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