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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노래

자연

by 우보천리

세상은 숨 쉬는 것마다 노래가 된다. 발걸음이 땅에 닿을 때, 강물이 돌을 맞이할 때, 구름이 하늘을 스칠 때, 그 모든 순간마다 고유한 선율이 흐른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깊은 노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서 우러나온다. 나무는 뿌리로 땅을 붙잡은 채 끝없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지만, 바람이 불어올 때면 고요함을 잠시 내려놓는다. 가지를 흔들며 몸을 맡기는 그 순간, 비로소 진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댕 뜰 앞에 서 있던 큰 은행나무를 보며 나는 종종 멈춰 섰다. 그 나무는 사계절 내내 다른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봄에는 연둣빛 새잎이 바람에 휘날릴 때 수줍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사귀가 비밀을 속삭이듯 바스락거렸다. 가을이면 노란 낙엽이 땅으로 흩날리며 이별의 멜로디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홀로 선 듯한 가지 끝에서 고요한 침묵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나무는 바람을 타고 계절의 이야기를 전하는 음악가 같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그 나무 아래에서 내게 말씀하셨다.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제 뿌리를 단단히 다져. 흔들림이 두려우면 아예 자라지를 못 하거든.”


그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성장의 숙제가 되었다. 흔들린다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단해지는 과정이라는 뜻이리라. 나무는 바람을 맞으며 비틀거릴지라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흔들릴수록 뿌리는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들고, 줄기는 울퉁불퉁해지며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간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바람이 거세게 불 때면 서 있기 조차 힘겨워지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내면의 뿌리를 내리꽂는 법을 배운다. 고요함만을 좇는 삶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균형을 찾는 법.


어느 가을, 오래된 산길을 걸을 때였다. 단풍이 물든 숲길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온갖 색깔의 잎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들은 서로 부딪히며 딱딱한 소리를 내고, 잎사귀들은 바람의 흐름에 따라 물결처럼 출렁였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문득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관현한 기분이 들었다. 높은 소나무의 깊은 울림, 밤나무의 중후한 저음, 단풍나무의 경쾌한 목소리까지. 각기 다른 음색이 한데 어우러져 숲 전체를 하나의 악기로 만들었다. 바람은 지휘자처럼 이들을 조율했고, 나무들은 악보도 없이 즉흥의 하모니를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노래’라는 것이 결국 흔들림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된 멜로디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울림이 쌓여 완성되는 것.

한겨울에 만난 버드나무도 잊을 수 없다. 연약해 보이는 가는 가지들이 차가운 북풍에 휘둘리며 할퀴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묘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꽁꽁 얼어붙은 호숫가에서도 버드나무는 황금빛 가지를 늘어뜨린 채 바람과 놀이를 계속했다. 마치 추위를 이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추위마저 자신의 리듬에 녹여내는 듯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 유연한 흔들림은 따뜻한 봄의 전주곡처럼 들렸다. 나무는 계절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시간 자체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문득 창밖의 벚나무를 보았다. 아직 잎이 피지 않은 가지에 새파란 봉오리들이 맺혀 있고, 보슬비에 젖은 줄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문득 불어온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며 빗물을 튕겨내는 소리가 댕청댕청 울려 퍼졌다. 마치 목탁 두드리는 소리처럼 정갈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 어느새 비 그친 뒤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흔들림이 남긴 여운이 공기 중에 스며들어 더욱 깊은 평안을 주는 순간이었다. 역동적인 소란 뒤에 찾아오는 고요는, 마치 음악의 여백처럼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한 방울이었다.

어린 시절 그 은행나무 아래에서 놀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바람이 강하게 불던 날에는 나뭇가지가 삐걱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곤 했는데, 그 소리가 무서워서 할머니 품에 파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러면 할머니는 나무껍질에 손을 대고 “이 나무는 지금 힘을 기르는 중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세월이 흘러 나도 어른이 되었을 때, 폭풍우에 휘둘리던 그 은행나무가 여전히 단단히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흔들림이 고스란히 기록된 줄기에는 이제 사람 팔뚝만한 굵기의 굴곡이 패여 있었고, 일부 가지는 부러진 채 새순을 틔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고통의 흉터가 아니라, 시간을 견뎌낸 위엄이 느껴졌다. 나무는 흔들릴 때마다 새로운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 같았다. 상처는 악보의 쉼표가 되어 다음 악절을 준비하는.

최근에야 나는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저항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것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뿌리로부터 영양을 받아 하늘로 향하는 성장, 그 사이를 흐르는 바람과의 대화. 매 순간 흔들리며 균형을 찾는 과정이 바로 생명의 연주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역경도 마찬가지일 터. 고요함만을 추구하다가는 목소리를 잃어버리기 쉽다. 진정한 노래는 흔들림 속에서 태어난다. 상처 입은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새순처럼, 넘어질 듯 흔들리던 순간들이 쌓여 하나의 선율이 된다.

산책길에서 만난 한 노인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나무는 흔들리면서 자라는데, 사람은 왜 흔들리는 걸 두려워할까?” 그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제 나는 바람이 불 때면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들의 연주를 듣는다. 삐걱거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휘파람 같은 울림까지. 그 모든 소리가 모여 지구의 심장박동 같은 리듬을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흔들림이 두려운 이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흔들릴 때마다 너의 뿌리가 땅속으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그 소리가 바로 너의 목소리로 쌓여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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