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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평

수업의 본질 1

자존

by 봄날의 소풍

'교사의 시선'에 이어 읽은 김태현 선생님의 책이다. 거침없이 진솔하게 풀어써 내려간 그의 수업에 대한 고민과 성찰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요즘 '클릭 교사'라는 신조어가 생겼다고 한다. 매 시간 ppt자료로 수업을 진행해 가야 마음이 놓인다는 교사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맨 손으로 수업을 한 적이 많다. 그림책이나 동화책 한 권, 또는 교과서 만으로 아이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눈을 마주치며 수업을 할 때의 스파크가 나는 참 좋았다.

수업에 대한 성찰에서 김태현 선생님은 다섯 가지의 요소를 뽑았는데 평소 나의 생각과 너무 같아서 깜짝 놀랐다.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학습자 사이에 놓인 교육과정의 원활한 흐름이 '수업'이다. 저자는 나다운 수업을 만들어가는 첫째 요소로 ‘교사의 자존’을 꼽는다. 학부모나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후배 교사들에게 당당히 교사는 학생을 존중하며 가르치는 교육의 주체, ‘갑’이 되라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교육의 자료는 '교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가 중요하다.


‘수업은 언제나 긴장의 현장이며 교사의 존재감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간이다.(18쪽)’


저자는 챕터의 논지에 맞게 명화를 한 편씩 소개한다. 교사의 자존감에 관련한 명화로 찰스 커트니 커란의 ‘언덕 위에서’ 작품을 꼽았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수동적이고 장식적인 존재로 살아가는데 반해 이 그림의 여인들은 주체적이고 사유하며 응시하는 표현이 돋보인다. 교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가 아니라 자신이 믿는 교육적 신념과 가치를 깊이 신뢰할 때 비로소 교사는 ‘가르친다’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살아낼 수 있다. 흔들리지만 내면의 중심이 있을 때 교실은 진심이 오가는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서서히 변해간다.(20쪽)‘


교사의 자존감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그 시작은 다름 아닌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데 있다. 그 소리는 늘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바쁜 일상과 타인의 기대 속에서 자주 흐려지고 만다.‘내면의 소리’와 자신의 부름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수업의 본질은 교사가 학생들을 의미 있게 성장시키려는 마음에 있다. 그 마음이 깃들 때 비로소 수업은 깊이를 갖게 된다. 교사의 마음이 꺾이는 순간, 수업은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정보만 나열하는 행위로 전락한다. 말은 넘치지만 울림은 없고 지식은 채워지지만 성장은 멈춘다. 학생을 바라보는 눈빛, 적은 가능성을 믿는 기다림,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는 기대, 그것이 있을 때 수업은 살아 숨 쉬며 비로소 사람을 향하게 된다.

(프롤로그 중에서)


어릴 적부터 크게 사고도 치지 않고 공부도 그럭저럭 해 오며 규범을 잘 따른 소위 모멉급 이상의 되는 교사들의 특징 중 하나는 완벽주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브레네 브라운의 ‘완변주의 그림자’에 따르면 완벽주의란 단순히 더 잘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나는 부족한 모습으로는 인정받지 못할 거야'라는 믿음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완벽함은 우리를 지켜주는 갑옷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고립시키는 벽이 된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구멍도 많고 덜렁 거리는 ‘나’는 무한한 위로를 받는다. 저자는 읽고, 쓰고. 그리고, 사랑하라고 한다.'읽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의 장면들, 수업 속에서 아이들의 표정, 나의 내면의 소리를 읽으라는 것이다.'쓴다'는 것은 자신과의 대화를 써나가는 것이다.'그린다'는 것은 창조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과정, 그려도 좋고 연주해도 좋고 어떤 예술적 활동도 된다. 나에 대한 자존감과 지성과 감성, 육체와 영혼에 대한 균형으로 교사로서의 나를 온전히 감싸고 품고 사랑하자는 첫 장의 내용은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와 회복이 된다. 이 책의 매력은 장마다 성찰하기에 유익한 질문들과 실천과제들이 있다. 그리고 주제마다 저자에게 영감을 준 인물들과 저서, 그에 대한 핵심내용 안내해 준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 장을 넘어가 보겠다.


찰스 커트니 커란, 언덕 위에서, 1909년 (캔버스에 유채, 76.2*76.2cm, 브루클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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