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나라의 선왕이 맹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저도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맹자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제선왕은 ‘무엇을 보고 아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맹자는 호흘이란 신하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왕이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가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예 흔종(釁鐘 종을 만들 때 종이 깨지지 않고 좋은 소리를 내도록 짐승의 피를 바르고 제사 지내는 의식)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죽음을 예감하고 벌벌 떠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왕은 명령합니다.
“소를 살려 주어라”
“그렇다면 흔종을 그만두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다. 소 대신 양으로 바꾸라”
맹자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왕께 물었습니다.
왕이 ‘그렇다’고 하자, 맹자는 “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족히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은 ‘비싼 소 대신 싼 값의 양으로 바꾸라’고 하였다고, 제선왕이 인색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맹자는 왕은 인(仁)을 실천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면서 인을 실천한 이유로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긍휼은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아파하기 위해선 최소한 보아야 합니다.
보기 위해선 만나야 합니다.
만나고 그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이론이 아닙니다.
멀리서 보고, 누구에겐가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긍휼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정의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주님은 포로된 자를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눈먼 자를 찾아가십니다
주님은 눌린 자를 찾아가십니다.
거기서 마음이 전달되고, 은혜가 나누어집니다.
가지 않으면, 긍휼은 이론뿐이지 실천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당하고 아파하는 자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