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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26. 2015

엇갈린 만남

정조와 홍대용

조선 최대의 현군인 정조와 조선 최대의 실학자 홍대용.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서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엇갈린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이 마음만 맞고 뜻만 맞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텐데...


35살 홍대용은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방문한다.

당시 조선사회는 오랑캐라고 했던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를 사모하며 중화주의적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송, 명 시대의 주류사상이었던 성리학을 끝까지 부여잡고 이제 조선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성리학의 보루요, 중화주의의 적통이라 생각했다.

조선 중화주의. 허울뿐인 명분론, 비현실적인 명분론에 사로잡힌 조선

그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혔던 한 젊은이가 북경을 방문하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60여 일간 북경에 머물면서 서양선교사를 찾아가 서양 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다.

지금까지 중국이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중화주의적 사고는 획기적으로 변한다.

지구는 공 모양이며 자전하고 있고,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계가 몇천, 몇만, 몇억 개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국과 오랑캐만 알고 있던 홍대용은 지구를 넘어 우주를 바라보는 획기적인 사고를 한다.

그가 서양과학을 그렇게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부친이 나주목사로 재직할 때에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를 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생각만 그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단한 수학자였다.

서양수학, 기하학 지식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고 결합하여 ‘주해수용’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북경 천주당에 들렸을 때 그는 처음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보았다.

건반 몇 개를 눌러보더니 바로 조선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한 마디로 절대 음감의 소유자였다.


그는 대대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의 핵심 가문인 남양 홍씨 집안이었다.

그는 안동 김씨의 본거지에 있었던 석실서원의 김원행의 제자였다.

더군다나 정조가 세손 시절 세손의 스승으로 궁에 들어갔다.

그의 실력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과거에 응시하기만 하면 출세는 보장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출세를 위하여 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장차 왕이 될 세손과 대화를 하면서 더욱 마음을 굳혔다.


세손인 정조는 한마디로 똑똑하고 영민한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중화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고, 실천적 학문을 중시했던 홍대용과는 달리 성리학에만 집중하는 정조와는 뜻을 같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같이 가기에는 서로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멋진 두 사람이 하나되지 못한 것은 조선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이렇게 빗나가고 있었다.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김도환 지음. 책세상에서 나온 책을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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