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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17. 2023

욥의 딸에게 숨겨진 이야기

성경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주인공이나 조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카메오처럼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주인공에 집중하다 보니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카메오에겐 눈길을 주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엑스트라도 풍성한 의미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한 경우가 고통받는 욥의 딸들입니다. 욥의 딸들은 욥기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 잠깐 등장합니다. 잠깐이기에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Weimar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Karl Wilcox 교수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욥과 그의 딸들 그리고 아내’(Job, His Daughters and His Wife)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그는 욥이 고난받기 전의 딸들을 대하는 모습과 고난받은 후 딸들을 대하는 모습에 차이가 있음을 살피면서, 욥이 고난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논증하였습니다. 

욥기 1장 4~5절에는 욥이 자녀를 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4-5)

이 말씀은 욥이 자녀를 믿음 안에서 잘 양육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WBC 욥기 주석을 쓴 David Clines는 욥의 아들들과는 달리 딸들의 생일잔치가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Clines, p.66). 또한 욥이 기도할 때 ‘아들들’을 위하여는 기도해도 딸들을 위하여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NIV 영어 성경은 욥이 기도할 때 딸들도 포함한 것처럼 번역했습니다(“Perhaps my children have sinned and cursed God in their hearts”욥1:5). 그러나 KJV은 히브리어를 따라 욥이 딸들을 배제하고 아들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번역했습니다(It may be that my sons have sinned, and cursed God in their hearts. Thus did Job continually”욥1:5). 한글 성경도 KJV을 따라 욥이 아들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욥기 서론에 등장하는 욥의 딸들은 차별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욥기 결론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욥기 42장 13~15입니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 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 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 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욥42:13-15)

욥은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딸들의 이름은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딸들의 아름다움을 한없이 칭찬합니다. 그리고 욥의 딸들에게도 아들들과 똑같이 유산을 분배하였습니다. 확실히 고난당한 후 욥이 딸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딸들을 대하는 자세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Wilcox교수는 욥이 부당한 고난을 겪으면서, 고난 당하기 전의 딸들이 겪었을 감정을 공유했으리라 추정합니다. 


고대 사회 여성은 인권이 없었습니다. 여성은 수로 세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딸을 잘 키우면,  나중에 결혼 지참금을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권력있는 사람들은 대개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한 마디로 딸들은 아버지의 재산 목록이나, 정치적 수단이었습니다. 성경은 고대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잘 표현합니다. 딸이 밖에 나가서 강간을 당하면, 당연히 받아야 할 지참금을 강간범에게 받고 딸을 넘겨주었습니다(신22:28-29). 고대 사회 여성은 사회적으로 인격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욥이 딸들을 소유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아들들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아들들의 생일잔치에 딸들을 초대함으로 최소한의 대우는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아들을 정말 선호하셨습니다. 장남인 제가 딸들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병원에 와보지도 않았고, 손녀딸들을 안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막내 남동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자의 백일잔치와 돌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었습니다. 물론 저의 딸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전도사 시절이었기에 딸의 첫 생일로 사진관에서 사진 한 장 찍은 게 전부였습니다. 막내 동생이 낳은 두 아들의 돌 잔치에 초대받아 간 저는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픔은 아직도 가슴에 아련히 남아있습니다. 


생일 잔치에 초대받아 간 것으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오히려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욥의 딸들이 경험했을 감정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여성이 모두 그런 대우를 받았기에 아무렇지도 않았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욥이 딸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았을까요? 욥은 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도 않은 것을 보아, 아마 딸들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때는 욥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사회 관습이 그러니까... 딸을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욥이 부당한 고난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잘못이나 죄가 전혀 없는데 왜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하면서 죄가 있으니 고통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욥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욥의 주변 사람들은 욥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욥기 19장에는 욥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욥의 친척과 종과 어린이들과 아내와 친구들이 욥을 거부하였습니다.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욥19:14)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욥19:15)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욥19:17)

“어린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욥19:18)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19:19)


욥은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욥19:21)

그러나 사람들은 욥이 큰 죄를 저질러서 고통당한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를 피했습니다. 죄인을 피하고, 죄인을 저주하고, 죄인을 돌로 쳐죽이는 것이 고대 사회 관습이었습니다. 욥의 아내가 욥을 저주한 것도 그 시대 관습을 생각하면, 나름의 일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욥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그에게 동정심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믿음과 그들이 당연히 행해야 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서로 충돌합니다. 그리고 명분뿐인 믿음이 언제나 승리합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 긍휼이 없는 종교생활, 말과 혀로만 하는 신앙생활의 헛됨을 깨닫습니다. 그는 부당한 고통 속에서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딸들이 겪었을 아픔과 소외감과 좌절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아버지에게 은연중에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다 결국 사고로 죽은 딸들의 아픔을 헤아립니다. 


욥이 고난에서 회복된 후 새롭게 낳은 딸들을 다르게 대우했습니다. 그는 아들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딸들의 이름은 하나하나 불렀습니다. 그 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칭찬합니다. 그리고 아들들과 똑같이 딸들에게도 유산을 배분해 주었습니다. 딸들을 통해서 결혼지참금을 얻고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욥은 그걸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 관습을 생각할 때 큰 파격이었습니다. 


Wilcox는 논문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욥은 죽은 딸들을 위해 더 이상 남녀 간의 화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만큼 긍정적인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두번째 얻은 딸들에게 유산을 물려줌으로 현세적 존재를 현저하게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당한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또는 왜 하나님이 때때로 사탄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도록 허락하셨는지) 결코 배우지 못하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사회에서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과 연민, 가능하면 공감을 표시해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배웁니다.” (WilCox, pp.314-5)


욥은 세상 사람들의 관습과 풍습을 생각 없이 따른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 관습을 정면으로 깨트립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문화적 개혁, 윤리적 개혁을 실천하였습니다. 그가 고통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 많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세속 사회의 풍습을 깨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행해야 할 정의와 동시에 자비와 긍휼과 동정심과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욥은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먼저 바꾸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참고도서 

Wilcox G. Karl, Job, His Daughters and His Wife,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Volume 42, Issue 3, March 2018, Pages 303-315

Clines J.A.David, WBC Job(WBC 욥기), 한영성 옮김, 솔로몬출판사, 2006.


https://youtu.be/6CGeoejEp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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