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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01. 2023

니느웨는 구원받았을까?

성경을 읽다보면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니느웨의 운명입니다. 요나서와 나훔서는 니느웨의 운명에 대해 정반대로 이야기하는 듯 보입니다. 요나와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서에선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는 반면, 나훔서에는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니느웨는 구원받았을까요?


이점에 대해 벨기에에 있는 Antwerp대학의  Karolien Vermeulen박사는 아주 독특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 성경에서 공간 개념을 주로 연구하는데, 요나서도 공간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오늘은 그가 쓴 논문, ‘공간적 관점에서 본 요나서에 나타난 니느웨의 운명”(Save or Sack the City: The Fate of Jonah's Nineveh from a Spatial Perspective)을 소개하겠습니다. 


공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진을 찍을 때,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초점을 주 피사체에 두면 배경은 보조요소로 흐릿하게 보입니다. 반대로 초점을 배경에 두면 주 피사체는 보조요소로 바뀝니다. 

요나서 3장에 보면 초점의 이동이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니느웨에 초점을 맞춥니다. 니느웨는 독자의 기대에 맞추어 크고 영광스럽고 사악한 도시로 묘사됩니다. 요나서에서 사용된 언어는 니느웨의 중요성과 힘을 강조합니다. 요나서 3장 2절과 3절에서 니느웨의 규모와 상징적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큰’( הלודנ)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용어는 도시의 물리적 규모와 그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요나서 3장 3절과 4절에서는 ‘걷다’(דלהמ)와 ‘날’(םוי)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니느웨의 크기를 강조합니다. 또한 3절의 하나님 앞에(םיהלאל)라는 구절은 니느웨의 위대함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 사용된 동사와 전치사는 공간의 수직 이동을 보여줍니다. 그건 마치 서울로 올라간다와 시골로 내려간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올라)가서 선포합니다. 요나서 3장 1-4에서 니느웨가 차지하는 공간적 개념은 높고, 크고, 위대하여 우러러 봐야 할 도성,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성을 의미합니다. 아마 요나는 니느웨 성의 크기에 질려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시골 사람이 서울이나 뉴욕같은 대도시에 가면 정신을 다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모두 앗수르의 니느웨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 3장 5절부터 초점이 바뀝니다. 6절에서는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8절에서는 니느웨의 백성과 모든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공간의 하향 이동을 의미합니다. 이제 니느웨에 맞추어졌던 초점은 하나님에게로 이동하고 니느웨는 작고 보잘것없는 보조 요소로 바뀝니다. 니느웨는 세상을 호령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교만하던 자리에서 내려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낮고 낮은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요나서는 니느웨의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회복을 의미하는데 니느웨는 결코 자기 위치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또한 요나서를 통해서 흔히들 선교적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요나서 3장을 통해서도 밝혔지만, 요나서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는 공간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서 1장 2절에서 니느웨를 언급하셨습니다. 이때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않고 도망칩니다. 가능한 한 수평적으로(욘1:3-4, 지리적으로) 혹은 수직적으로(욘1:5,15,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칩니다. 요나는 공간을 이동하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간은 인간의 지리를 초월하며, 어떤 공간에서든 하나님의 통제와 섭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나서 1장과 2장은 요나의 물리적 이동은 결국 하나님의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에 불과함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요나처럼 하나님을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예배당 안에 갇혀 계신다고 믿지는 않지만, 실제 행동은 요나처럼 갇혀 있는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즉 자신의 삶의 공간(직장, 세상, 취미, 가정)에선 자기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선 인간은 바벨탑을 쌓아, 높고 높은 공간을 차지하므로, 인간의 힘과 지혜와 위대함을 선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공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서 통제권을 가지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서를 통해서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가 어떠함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공간은 국경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정치적 당파성을 초월하고, 세상의 문화를 초월하십니다. 


요나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니느웨의 구원이냐 멸망이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분도 계시지만, 베르뮐렌 교수는 요나서에는 세상의 모든 공간을 통제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 초점이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공간 분석에 따르면 니느웨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기고만장하여 자기가 최고임을 자랑하던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니느웨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니느웨의 멸망은 잠시 보류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꿇은 것이 진실한지 거짓인지 이후 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요나서를 공간 개념으로 읽으면, 공간적 역동성속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와 섭리가 분명히 드러나고, 그에 따른 인간의 반응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니느웨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공간개념을 통해 우리는 요나서에서 단순한 구원의 메시지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읽게 됩니다. 


https://youtu.be/efoMcqIrj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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