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여서 한 여학생과 데이트를 할 기회를 가졌다.
명동의 한 제과점에서 만났는데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사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명동성당 쪽으로 걸어가는데 다리 불구가 되어 앰프에 찬송을 틀어놓고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그 걸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여학생은 나에게 말하였다.
노숙자나 걸인에게 돈을 주면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살 생각은 안 하고 늘 구걸만 하게 된다.
그러니 앞으로 적선하지 말라고 점잖게 충고하였다.
난 그날 이후로 그 여학생을 만나지 않았다.
말이야 틀린 말이 아니지만, 난 그 여자에게서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보지 못했다.
따뜻한 인간미가 없는 여자는 내가 원하는 타입이 아니다.
자포자기(自暴自棄)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스스로 해치고 버린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원래 사용했던 맹자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 도리인 예의를 비방하는 것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분명히 알면서도 행치 않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약간 의역을 했지만, 맹자의 말을 나 나름대로 해석한 말이다.
맹자가 말하는 예의는 그저 인사치레를 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유교의 가장 핵심 덕목인 인(仁)이다.
인을 기독교식으로 풀어보자면 사랑하는 마음, 긍휼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이 없다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고, 인을 실천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 행치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것이란 뜻이다.
다산 정약용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건 결코 진정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유학에서 인간의 본성과 심성을 수련하는 것에만 몰두하였지 실천하지 못함을 꼬집은 말이다.
경전의 해석에는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게을렀던 당대 유학자들의 모습이나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같기는 매한가지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약2:16)
말로만 불쌍히 여기는 아무 쓸모없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냉정한 판단력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를 품어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