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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17. 2015

인터넷 시대의 맹자와 순자

전자 시대에 미디어 비평가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은 전자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 

16세기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가져온 영향력은 엄청났다. 

필사한 책 한 권 값이 집 한 채 값보다 비쌀 때는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저렴한 책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특정한 계급만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대중도 알게 되었다. 

이건 정보 혁명이었다. 

그 정보 혁명 덕분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샬 맥루한

인쇄술(책이나 신문)이 가져온 지식 확장도 엄청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소통이었다. 

19세기 전자매체(TV를 포함한 인터넷까지)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쌍방향적 정보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 (The medium is the message)’라고 말하였다. 

모든 미디어 매체는 우리 자신의 확장이며, 오감의 확장이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에 대하여 순간순간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미디어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인쇄술의 영향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해졌다. 


전에는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던 것이 이제는 인터넷이란 온라인 공간 안에서 매우 평등하게 대화한다. 

온라인 공간 안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 사상, 생각들을 여과 없이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른과 아이가, 사장과 평사원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남자와 여자가 어떤 제한 없이 평등하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지도자들이 일방적으로 제안하고 제시하는 것에 따랐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하여 누구라도 반박하고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 공간이기에 때로 인격적 모독이나, 몰상식한 고집과 편견, 온갖 루머와 비방들이 난무하는 약점이 있긴 하다. 

데이비드 와인버거

그렇지만 데이비드 와인버거(David Weinberger, 1950~)는 “인터넷 공간에는 필연적으로 도덕성 특성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온갖 쓰레기 같은 정보들과 고집들과 생각들이 난무하는 온라인 공간에 대하여 낙관적인 생각을 하였다. 

위키피디아(Wikipedia)나 네이버 지식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집단 지성은 인터넷의 허술한 지식의 틈새를 메꿀 수 있다. 

그리고 잠시 추악하고 비열하고 더러운 온라인 공간을 집단의 힘으로 자정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치 맹자가 전국 시대에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인륜의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배신과 모략 속에서 살육이 자행되는 전국 시대에 맹자는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상황과 현실을 보면, 쓸데없는 소모적 전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인간이 선하다니...

도덕적으로 정치하면 얼마든지 통일 왕국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맹자

놀라운 사실은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맹자의 사상이 세월이 지나자 중국 사상사의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에 그리고 현재까지 맹자의 사상은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읽히고 있다. 

현실과 그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과 비전은 결국 승리하는가?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현실만 바라보고 있는 나는 맹자나 와인버거의 낙관론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마치 맹자 시대의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진 않지만,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바꾸어 선한 쪽으로 유도하자는 것이다. 

맹자나 순자 모두가 선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같지만, 나는 왠지 맹자보다 순자 쪽에 더 마음이 간다. 

맹자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선한 마음을 강조한 것이라면, 순자는 마음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았다. 

사람에게는 텅 비고 하나이면서 고요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교육과 감화를 통하여 얼마든지 선하게 이끌 수 있다고 순자는 보았다. (맹자 / 정현근 지음 / 한길사/ 105쪽) 

그런 면에서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순자

이제 온라인 공간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매일같이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때로 떠나고 싶고, 아니 집어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상처받을 때도 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이런 낙관적 소망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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