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2년 사순절에 취리히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매년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의 규례를 일부 츠빙글리 추종자들이 깨트렸기 때문이다.
채소나 생선만을 먹어야 하는 전통을 어기고 소시지를 먹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사순절 기간에 금지된 육신을 한 이들은 가벼운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여기에 대하여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67개 핵심 논제들(67 Schlussreden)'을 발표하면서 사순절 육식 금지가 성경적이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물론 사순절 육식 문제만이 아니라 '67개 핵심 논제들'에는 성직자의 결혼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에 제1차 취리히 논쟁이 벌어졌다.
학문적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 이 논쟁은 취리히 시청에서 개최되었다.
논쟁의 승리는 츠빙글리였다.
그러나 더 큰 소득은 취리히 시의회가 얻었다.
이 논쟁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권한을 시의회가 행사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로마 가톨릭이 성경 해석의 권한을 가졌던 것이 이제는 시의회 정부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바젤, 베른, 제네바에서도 비슷한 양태로 나타났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시의회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종교개혁을 진행할 수 없었다.
칼빈과 같은 경우, 지속적으로 시의회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바른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반면에 루터는 아예 정권을 쥐고 있는 제후의 편에 확실하게 서버렸다.
1525년 루터의 사상에 동조하여, 평신도였던 농민들이 반란했을 때 루터는 철저하게 제후의 편에 섰다.
그는 덜 교육받은 회중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으므로 여러 가지 제제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비텐베르크 공국의 학교는 가장 유능한 학생들에게만 최종 학년에서 신약 성경을 가르쳤다.
그보다 훨씬 많은 나머지 보통 학생들은 성경을 배우지 못하고 다만 루터의 소요리문답만 읽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성경 해석의 권리가 오직 교황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던 가톨릭처럼 이제는 성경 해석의 권리가 똑똑한 지식층에게만 있다고 제한하는 것은 루터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정녕 성경 해석은 시의회나 똑똑한 지식층에게만 있는 것일까?
성경해석의 최종 권위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교황일까? 기독교 공동체의 회의일까? 시의회일까?
아니면 니콜로 테데스키(Nicolo' Tedeschi, 1386-1445)가 비웃듯이 말한 것처럼 성경을 잘 아는 경건한 개인일까?
사실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해석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경의 바른 해석을 정답처럼 하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인지 공인해주는 식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그러한 권한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기독교 역사가 이미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수많은 이단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문제를 일으킨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종교개혁자들은 개개인이 성경을 읽을 권한(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부여한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결정이다.
보수적 기독교에는 One Text에 One Meaning만 있다고 고집부리고 싶겠지만, 기독교계 안에 새롭게 성경을 해석하는 주석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러한 고집은 그만 포기해야 하지 않는가?
종교개혁자들은 시대와 상황의 변화 속에서 성경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그리고 그러한 해석들이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정작용으로 옳고 그름이 분별 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
나는 종교개혁자들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