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년 전 북경을 포함한 중국 전역에 코끼리가 살았다. 중국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코끼리 뼈와 청동기에 새겨진 코끼리 모습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갑골문자에 코끼리 상(象)자는 실제 코끼리의 모습을 본뜬 글자다. 중국 은나라, 상나라 시대(BC1600~1046)에 사용된 술병 중 제례용으로 쓰이는 상준이라는 술병은 실제 코끼리 모습을 그대로 살려서 만들었다. 그러나 주나라(BC1046~BC771)의 상준은 코끼리 모습이라고 만들었는데 오히려 돼지에 가깝다. 학계에서는 상나라 때에는 코끼리들이 융성했지만, 주나라 때에는 코끼리가 대부분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코끼리의 서식지인 숲이 경작지로 바뀌고, 농작물 보호를 위해 코끼리를 잡아 죽이고, 전쟁이나 운반을 위해 사용하다 보니 그 개체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마침내 멸종하고 말았다.
한비자에 보면 ‘해로’ 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이 산 코끼리를 보기 힘들게 되자 죽은 코끼리의 뼈를 구해, 그림을 그려 산 모습을 떠올려 보곤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뜻으로 생각하는 것을 모두 상(象)이라 말한다.” (일침 / 정민 지음 / 김영사 / 144쪽) 코끼리 뼈만 보고 코끼리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 어떠했을까? 실제의 코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추상화(抽象化)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신라 시대 원효(617~686)는 의상(625~702)과 함께 선진 불교를 배우러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650년 처음 유학을 떠났을 때는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가지 못했다. 661년 다시 유학을 떠났지만,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였다.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원효는 자신이 눈을 뜨고 있지만, 사실은 소경과 같음을 깨달았다. 해골에 괸 물을 시원한 생수로 생각하고 마셨으니 소경이나 다를 바 없다. 그는 눈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비유를 통하여 당시 불교가 다양한 이론으로 싸우는 것을 화해시키려 하였다. 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지만, 그들은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알 뿐이다. 그래서 원효는 말한다. “모두 옳다. (개시·皆是)”
최소한 자기가 경험하고 깨우친 부분에 대해서는 옳다. 그러나 코끼리의 전모는 모른다. 따라서 원효는 “모두 틀렸다. (개비·皆非)"고도 한다. 상대방이 옳으면 나도 옳은 점이 있고, 상대방이 틀리면 나도 틀린 점이 있다. 양자 간의 다툼이 있을 때 그렇게 상대방을 인정하고, 마음을 열고 들으면 화해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원효의 화쟁론이다.
원효의 화쟁론은 서로가 동등한 입장일 때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세상은 갈수록 복잡하여 단순히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많아졌다. 한쪽은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있고,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면, 원효의 화쟁론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는 실제로 여러가지로 억눌린 자들의 친구로서, 구주로서 성문 바깥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성문 바깥쪽은 전통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이요, 소외된 곳이다. 성문 밖은 쓰레기나 오물을 처리하는 곳이었고,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판정한 한센병 환자나 전염병 환자들이 방치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것은 굉장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예수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려고 왔다. 간디나 톨스토이가 비록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려고 한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