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큰 맘 먹고 책장 정리를 하였다.
그동안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은 책들을 솎아내었다.
대략 천 권이 넘는 것 같다.
그중에는 60여 년 전 아버지가 정성껏 모은 책들 수백 권이 있다.
아버지의 책 사랑은 유별났다.
가난한 시골 목회자였음에도 없는 돈을 쪼개어 한 권 한 권 책을 사모으셨다.
그렇게 모으신 것이 2천여 권이 넘는다.
포대종이를 뒤집어 매끄럽게 코팅된 부분을 사용하여 책의 겉표지를 만드셨다.
책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기니 조금 변색하기는 했지만 처음 살 때의 책 표지가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책 제일 앞에는 몇 년도 어디에서 사셨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책을 읽으실 때는 언제나 정좌를 하고 읽으셨으며 줄을 그어도 자를 대고 반듯하게 줄을 그으셨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책들은 이제 누렇게 변색이 되어 버렸다.
국한문이 혼용되고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읽을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버리려고 생각하니 마치 아버지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아 아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슬퍼하실까!
30년 전 대학 다닐 때 돈이 없어서 헌책방을 전전하며 애써 모았던 나의 책들도 있다.
점심값을 아껴서 사 모았던 책들이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책을 읽으면서 줄을 삐뚤빼뚤하게 그었고, 여기저기 메모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청춘의 뜨거운 열정이 보인다.
한 권씩 쓰다듬으면서 내 마음 한 자락을 내려놓는다.
추억은 이렇게 내 곁을 떠나고 있다.
천여 권이 넘는 책을 폐휴지 모으는 곳에 가져다주었더니 달랑 만7천 원 준다.
신간 서적 한 권 살값이다.
그렇게 텅 비어 버린 책장에 요즘 사서 읽은 책들로 가득 채웠다.
이렇게 한 세대는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는 법인가 보다.
책 정리를 하다 우연히 23살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하였다.
일기장에는 시도 있고, 독서 노트도 있고, 나름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며 자서전을 쓴 흔적도 보인다.
온종일 책장 정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소파에 기대어 일기장을 읽어보는데 왠지 모르게 웃음도 나오고 때로 젊은 날의 내 모습에 기특하였다.
그때 이런 노트를 많이 썼던 것 같은데 그동안 20여 번 이사하다 보니 다 잃어버리고 이것 하나 남았다.
군 생활 중에 썼던 일기장인데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105연대가 내일 모래면 이사를 간다.
그동안 한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해오던 이들이었는데...
특별히 1월 군번의 이영목은 교대 2년을 마치고 입대한 친구다.
그가 어젯밤 내 옆자리에 누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그냥 이렇게 끊어지지 말자.
서로 취미(文學- 내가 그때 문학을 무척 사랑했나 보다.)도 같고 하니까 소식 전하도록 하자.
유근이도 같이 사귀고 싶은 친구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군에서 사귄 훌륭한 친구들 놓치고 싶지 않다.
얼마나 좋은가! 그들.
박영배, 천윤배, 이유근, 채희정, 권세진, 김해진, 권성문, 이영목, 유기산, 김재훈, 박근홍, 이기배, 정두화, 이종재, 최윤주..
소식을 전하도록 해야겠다."
정말 아쉬운 것은 일기장에 기록된 많은 이름의 얼굴을 이제는 기억조차 못 한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렇게 훌륭한 친구라고 했는데
끝까지 소식 전하며 끊어지지 말자고 다짐했던 이영목조차 모습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박영배와 작년에 페이스북을 통해 찾은 천윤배 뿐이다.
나머지 다른 친구들은 희미한 안개처럼 모두 기억 속에 사라졌다.
인생은 이렇게 추억과 아쉬움 속에 떠나가는 것 같다.
매일 매일 순간순간이 아쉽다.
오늘은 또 내일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겠지.
묵은 책들은 내 청춘의 한 자락을 데리고 떠나갔지만, 그리웠던 친구들, 잊혀진 친구들의 이름을 남겨 주었다.
이 가을에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다.
"우정을 지키는 일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소중하다.
친구가 없는 것만큼 적막한 것은 없다.
우정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감해주기 때문이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hasar Gracián 1601∼1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