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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24. 2015

스승을 사랑한 소치 허련

전남 진도의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 남종화의 마지막 불꽃을 사른 소치 허련이 있다.

그는 시골에서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다 초의선사의 눈에 띄어 추사 김정희를 소개받고 일생 추사를 스승으로 모신다.

32살 적지 않은 나이에 스승을 모시게 된 허련은 지극 정성으로 스승을 대하였다.

소치 허련 (1809~1892)산수도(山水圖), 종이에 수묵담채, 31.5×23.5㎝

추사는 안동 김 씨의 미움을 받아 9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추사에게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오직 허련만 그 먼 제주까지 추사를 찾아가 그를 돌보았다.

9백 리 바닷길을 조그만 거룻배에 목숨을 걸고 항해를 했으니 스승을 향한 성심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다.

소치는 고백하기를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스승을 찾았다고 한다.

그것도 한번 찾아간 것이 아니라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갔다.

소치 허련

한번 추사를 방문하면 적어도 5개월 이상 머물면서 추사를 돌보고, 그의 말벗이 되기도 하고, 그에게 그림을 사사하였다.

추사도 허련의 진심을 알았기에 그를 마음의 제자로 여겼다.

복권될 가능성이 있어서 추사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스승이기에 한마음으로 모신 것뿐이었다.

소치의 산수도

사실 추사 김정희는 성격이 부드럽지 않았다.

남을 평할 때도 적당히 칭찬할 법한데 절대로 그러는 법이 없었다.

당대 사람들의 묘사에 의하면 추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고, 권위적이며, 날카로운 비판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그런 김정희가 소치 허련에 대해서만큼은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만한 화가가 없다."든지,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치가 그린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은 스승의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그 두 점 모두 다 스승을 더없이 자애롭고 원만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들이 스승을 어떻게 보든 소치 허련은 스승을 고마운 분, 존경할 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죽은 후에도 소치 허련은 일편단심 스승의 길을 뒤따르며 일생을 살아갔다.

소치가 그린 추사 김정희

요즘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들이 몇 분 계신다.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조선 시대 때 사제간의 정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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