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를 보고서
천한 무수리 소생이었던 영조는 늘 출신 콤플렉스가 있었다.
영조가 결혼하여 처음 신방에 들어 갔을때 신부의 손을 보고 한마디 했다.
“손이 참 곱다."
“귀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
그 한마디가 출신 성분이 미천한 자신을 비웃는 뜻으로 곡해하여서 두 번 다시 왕비의 침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출신 콤플렉스가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그는 왕자답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몸부림치며 공부에 몰두하였다.
혹여나 공부에 힘쓰지 않으면 '무수리 자식이니 별수 있겠어.'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똑똑하였고 공부에 취미도 있었다.
그는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왕자로서 본능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식이 강했다.
사대부의 눈치를 보면서 줄다리기를 하는 심정은 마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감정은 날마다 춤을 추었고, 뒤로 들리는듯한 신하들의 비웃음 소리에 극도로 예민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 50년(1774년)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 자리만 해도 한 해에 21명이 거쳐 갔고, 한 번 바뀐 사람이 다시 임명되는 경우가 다섯 차례여서 모두 26차례나 사람이 바뀌었다.
그의 감정 기복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만하다.
그러니 주변의 모든 사람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온갖 비방과 헌담 속에서 결국 살아남았다. 왕으로서.
영조는 아들도 자기와 같이 피비린내 나는 구중궁궐에서 홀로 살아남기를 원했다.
자기보다 더 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따뜻함을 포기하고 아들을 원수같이 대했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 해리 할로(Harry Harlow, 1905~1981)가 ‘사랑의 본질’이란 책을 썼다.
그는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다.
그는 평생 심한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과 언어장애를 앓았다.
25살에 대학교수로 임용된 그는 붉은털원숭이를 대상으로 아주 잔인한 실험을 하였다.
갓 태어난 원숭이를 어미와 격리하고 철사로 된 가짜 엄마를 넣어주었다.
사랑도 주지 못하고, 우유도 주지 못하고, 안으면 차갑기만 하고 찔리기만 하는 엄마였다.
연구 결과는 매우 상식적인 결론으로 끝난다.
사랑의 스킨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자란 원숭이가 나중에 정상적인 원숭이 사회에 들어갔을 때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지나친 집착, 심각한 공격성을 드러내며 자기 몸을 자해하고 주변에 있는 것들을 찢거나 파괴하였다.
짝짓기도 실패하기 일쑤였고, 설혹 성공했다 할지라도 자식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잔인한 실험은 동물 학대로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사도는 어머니의 사랑스런 품이 그리웠고, 아버지의 다정한 눈길 한 번, 따뜻한 말 한마디를 원했다.
그렇지만 조선의 왕실에는 그게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 역사가 잔혹한 피 냄새로 가득 찬 것은 예법을 강조하는 형식주의, 권위주의, 당파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왕들의 몸부림 때문이었다.
영조는 그 잔혹사의 중심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아들 사도는 버틸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따뜻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사도세자는 학자형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술가적 기질이 강했다.
그는 글 읽기보다는 시 짓기나 그림 그리기에 더 관심을 가졌다.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기보다는 밖에 나가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왕으로서의 예법보다는 따뜻한 인간미가 풍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예법만 따지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면서 학자인 척하는 사대부 사회의 뒷모습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소리친다.
“그대들은 어찌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라면서 국방의 의무는 힘없고 굶주린 백성에게만 짐을 지게 하려는가?"
앞에서는 화합을 이야기하고 군자인 척하지만, 뒤에서는 온갖 모략질과 패악을 범하는 소인배 같은 저들이 싫었다.
아니 조선의 사대부 사회가 전부 싫었다.
그는 자유인이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해서 그림을 그렸던 새비지-랜도어(A. H. Savage Landor, 1865~1924)가 있다.
그는 서양화가로서 최초로 고종황제의 어진을 그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인류학자이자 화가로서 그는 조선과 조선사람을 그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상류층에 올라갈수록 사대부의 아내들이 정신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라리 하층민의 여성들은 거리를 활보하며 악다구니를 하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댁 마님은 소실에 대한 질투를 안으로 삭여야 했고, 사대부의 엄정한 법도 아래서 참고 살아야 했기에 정신질환이 많이 발생한다고 썼다.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 신복룡 지음 / 풀빛 / 113쪽 참고)
사대부 집안이 그러하다면 왕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정신이 자유로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살았던 조선 왕실은 그에게 곧 뒤주였다.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지 실상은 죽은 이와 같은 삶이었다.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소."
사도세자의 울부짖음은 아직도 가슴 저미게 아픔으로 다가온다.
정조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슬픔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도 유교의 예법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부적응자는 아니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무수리나 후궁이 아닌 정실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영조만큼이나 공부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비록 아버지의 한을 가슴에 담고 있었지만, 개인적 복수에 연연하지 않고 정치 변혁으로 승화시킨 것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왕비에 준하는 대우로 잔치하고 어린 아들 정조에게 왕비에게만 가능한 4배로 절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왜 4배로 절했느냐 물었을 때 어린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공자도 그랬습니다. 사람의 말단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저는 그날 아비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조선 왕실에는 사람은 없고 예법만 있었다.
그렇게 예법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하던 정조가 자기 부모에 대해서는 끔찍한 효를 실천했지만, 자기 부인에게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는 할아버지 영조만큼이나 왕비의 침전에 들지 않았다.
사실 효의왕후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일생을 검소하게 살았으며 여러 번 존호가 올려졌으나 거절한 아주 착하고 겸손한 왕비였다.
조선의 왕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늘 가정적 불행을 품고 있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왕들이 없었던 것이 조선 유교사회의 비극적 역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