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난적, 문체반정, 신유박해
사문난적(斯文亂賊 )
사문난적은 원래 유교 사상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상대방을 숙청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 첫 번째 사례가 송시열이 윤휴를 공격하면서 유교 경전을 주자(朱子)의 방법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르게 해석했다 해서 사약을 내려 죽이게 한 것이다. 사실 윤휴는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주자의 해석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자의 성리학이 반드시 정답이라 할 수 없으므로 고대(古代)의 유학 정신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정파를 초월해서 많은 유학자에게 칭송을 받았다.
사실 송시열 역시도 윤휴의 학문적 깊이는 자신이 감히 따라갈 수 없음을 고백하였다. 송시열이 송준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휴와 만나 3일간 토론하고 나니, 내가 30년 독서한 것이 참으로 가소롭게 느껴졌다.’고 말할 정도로 윤휴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송시열은 반대 정파의 학문적 기둥이었던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비판하여 공격하였다. 이후 사문난적이란 표현은 주자의 학설 이외에 다른 소리를 말하거나 주장하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유교의 수많은 이론과 해석을 다 차단하고 오직 주자의 해석만 옳다고 주장하며 사상적으로 획일화시켜버렸다. 그리하여 다른 생각, 다른 주장, 다른 의견은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유교(주자학)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상적 획일화가 가져온 폐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각하여 결국, 조선을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문체반정(文體反正)
개혁군주로 칭송받는 정조(正祖)는 청나라로부터 불어오는 새로운 학풍에 대하여 염려를 하였다. 당시 청국을 다녀온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선풍적 인기를 얻으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전통 성리학에서는 대개 도를 논하거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고어체 글로만 가득하였다. 그렇지만 박지원은 자신의 감정을 글에 그대로 투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정조는 이런 참신한 문장에 대하여 평가절하하면서 다시 전통 성리학의 문체인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그것이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정조는 신하들의 글을 일일이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통고문체로 글을 쓰지 않는 신하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불이익을 주기 시작하였다. 이미 세상은 변화되어 새로운 문체, 새로운 사상이 물밀듯 들어오는데 다시금 예전 시대로 돌리려고 하였던 정조의 모습은 결코 개혁군주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정조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이 이상적 국가로 생각하였던 요순시대의 임금들처럼 왕이 곧 선생이고, 왕의 사상을 가르침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표현의 획일화를 위하여 검열하고 숙청하고 정치적 불이익을 주었던 정조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하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람은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옥(1760-1812)이란 사람이다.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은 시대를 역행하는 정책이며, 문학적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정책이라 생각했다. 누가 읽어주든 말든 개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느낀 감정, 보았던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기록하였다. 심지어 그의 글에는 양반들이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는 방언이나 속언도 많이 등장한다. 한 시대를 앞서간 이옥은 결국 과거의 길도 막히고 험한 인생을 살다 역사 속에 묻혀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를 알아주었던 유일한 친구 김려(1766-1821)에 의해 그의 작품이 전해지게 되었다. 결국, 문체반정은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막으므로 획일화된 세상에서 경직된 생각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신유박해(辛酉迫害)
조선 후기 연행사의 왕래는 나라 바깥 정보를 수집하는 통로이자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조선의 처지에서 볼 때, 북경은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수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조선의 학자들은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보고 배울 기회를 가졌다. 천주교 신부들 역시 조선에 포교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들을 후히 대접하고 선물까지 주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결코 천주교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신기한 눈요깃거리로 생각하고 천주당에서 침을 뱉는 등 몰지각한 행동을 하기 일쑤였다.
반면에 홍대용은 학자적인 자세로 천주당을 방문한 최초의 선비라 할 수 있다. 그는 독일인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과 포우관(鮑友管, Anton Gogeisl)을 만났다. 그는 서양의 윤리와 학문에 관하여 물어본 뒤 천체망원경을 보자고 하여 그 형태와 작동 원리를 꼼꼼히 기록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을 배웠고, 회중시계와 만년필, 파이프오르간을 보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는 서양 학문에 감탄하여 북경 연행록인 ‘담헌연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제 서양의 법은 산수로써 근본을 삼고 의기(儀器 : 천체기구)로써 참작하여 온갖 형상을 관측하므로, 무릇 천하의 멀고 가까움, 높고 깊음,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운 것들을 모두 눈앞에 집중시켜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하니, '한·당 이후 없던 것이라' 함은 망령된 말이 아니리라.”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천주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천주교는 사학이고 천주당을 가까이 하면 사상범으로 몰려 어떤 고초를 치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북경 천주당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접촉할 기회를 잃어버린 조선은 점점 세계정세에 어두워지고, 서양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성리학이 비록 좋은 학문이라 하더라도 정치 이데올로기화 될 때 사상은 폐쇄적이 되고, 나라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훌륭한 사상과 생각이라 할지라도 정치 이데올로기화 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