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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Oct 27. 2015

앞뒤가 꽉 막히고 답답하다!

내가 들은 것을 그대로 옮기면, 여러분이 너나없이 편을 갈라서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베드로의 사람이다”, “나는 메시아 그룹에 속해 있다”고 말하면서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 

코린트 양식으로 지은 포세이돈 신전

고린도는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 남쪽에 있는 도시로 코린트 양식이라는 건축 양식을 시작한 곳이다. 남부 그리스의 주 정부가 위치한 도시로 육상, 해상의 교통 요충지로 부유한 도시다. AD 51년에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는데, 바울이 떠나자 교회는 사분오열되었다. 설립자인 바울 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바울의 후임자요 언변이 뛰어난 아볼로 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 편이라고 말하는 사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메시아 그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가 막혀 고린도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편지를 썼다. 


함석헌 선생은 ‘열두 바구니’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골리앗을 때려 넘겼기로서 조약돌을 비단에 싸서 제단에 둘 거야 없지 않은가?

위대한 것은 다윗이지 돌이 아니다. 

그것쯤은 다 알면서 또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역사의 냇가에서 되는대로 주워든 한 개 조약돌임을 왜 모르나. 

세상에 조약돌 섬기는 자 어찌 그리 많은고!

골리앗 죽었거든 돌을 집어 내던져라! 

다음 싸움은 그것으론 못한다."

함석헌

함석헌 선생의 말인즉 '다윗도 하나님의 손에 들린 조약돌에 불과함을 왜 모르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신격화하여 섬기려는 태도를 보이자 하나님은 모세의 무덤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미화하고 영웅시하여 얻는 교훈도 조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자칫 우상숭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성경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적나라게 기록한 이유를 잘 살펴야 한다.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인간은 없다. 모두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일 뿐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잠시 사용하던 조약돌일 뿐이다. 조약돌이 아무리 멋지게 사용되었어도,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나면 새로운 조약돌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조약돌이 더 좋은 것이라고 싸우고 난리다. 


정민 교수가 쓴 '조심'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822년 다산이 해배되어 고향 마재에 있을 때, 영남의 남인 이인행이 낙향하면서 다산을 들려 대화한 내용이다. 다산은 61세였고 이인행은 65세였다. 22년 만에 만난 둘은 반갑게 인사한 후 공부 이야기를 하였다. 이인행은 서울의 학자들이 여러 가지 책을 잡다하게 엮고 편집하여 장황하게 꾸미기만 할 뿐 마음의 공부는 등한시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다산은 영남의 앞뒤가 꽉 막힌 학풍을 비판하면서 ‘안동답답安東沓沓’이라고 비판하였다. 오직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을 아예 듣지 않으려는 영남의 학풍을 지적하였다.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무조건 배척한다. 번번이 자신만 옳다며 남을 꺾으려 든다.  오가는 말은 날카롭고 마음 씀은 험하다. 든 것도 없이 선배를 우습게 본다. 한 편이면 어울리고 다른 편이면 함정에 빠트린다. 자기편이 잘못하면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라 하고, 다른 편이면 조그만 잘못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둘이 날카로운 설전이 오갔지만, 서로 비판의 글을 나눠 가지면서 더욱 힘써서 노력하자는 말을 하고 쿨하게 헤어졌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대화를 아는 사람이다. 

다산이 지적한 안동답답은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 현실에서나 여전히 변함없다. 답답한 사람과 집단과 상황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서로 비판하는 것을 마음 열고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고깝게 여기고 가슴에 칼을 갈아둔다. 누구를 찌르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 칼날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듯하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그 어떤 인물도 영웅시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리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의 파당을 이루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악한 인간사회에 파당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발 대화가 통했으면 원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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