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하면 세 가지가 생각난다.
이슬람, 전쟁, 축구
중동에 여러 나라가 있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 별로 없다.
우리는 카타르 도하를 거쳐 요르단을 잠시 여행하다가 이스라엘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중동의 두 나라 카타르와 요르단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쫄깃쫄깃하였다.
그런데 막상 카타르 항공기를 타서 보니 뜻밖에 비행기가 참 좋았다.
좌석도 비교적 널찍해서 나 같이 다리가 긴 사람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10시간 55분 비행 끝에 우리는 카타르 도하에 도착했다.
카타르 도하 공항은 국제공항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하고 편리하였다.
이슬람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빼면 이곳이 과연 중동인가 할 정도였다.
우리는 4시간 동안 도하 공항에 있으면서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중동 사람들과 사진도 찍고 안 통하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몸집이 산더미만 한 중동 남자들이 대여섯 명 앉아있는 틈바구니에 같이 간 우리 일행이 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더니 오만에서 왔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어디냐고 했더니 오만이라고 한다.
나도 한번 가보기를 원한다고 했더니 껄껄 웃으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국내 정세가 그리 평온하지 않은 것 같다.
장난기를 섞어가면서 대화를 하는 그들의 신분이 자못 궁금하였다.
혹시 오만의 유력 정치인? 아니면 엄청난 중동의 갑부?
아무런 격의 없이 대해주는 그들의 모습에서 중동에 대한 경계심이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요르단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를 마중 나온 아브라함 선교사님을 만났다.
그는 일단 요르단이 얼마나 안전한 나라인지를 설명하였다.
요르단은 우리나라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요르단의 전력 산업을 우리나라가 대부분 담당하여 개발하고 있고, 수자원 개발과 관리 시스템도 우리나라가 맡아서 추진하고 있다.
길거리에는 한국차가 70% 정도 차지할 정도로 현대, 기아 차들이 넘쳐났다.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치안도 잘 확립되어 있어서 여행하기에 좋은 나라라고 한다.
과연 보이는 풍경은 어느 도시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하고 안전해 보였다.
우리가 제일 먼저 간 곳은 헤롯의 여름 궁전이 있는 마케루스(Machaerus)였다.
보통 궁전 하면 경치 좋은 곳, 정원이 잘 가꾸어진 곳에 아주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을 연상한다.
그러나 마케루스에 도착해서 본 것은 한마디로 실망이었다.
광야 한가운데 삼각 원뿔꼴 산꼭대기에 헤롯의 여름 궁전이 있다.
더욱이 문이 닫혀있고, 시간도 없는 관계로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올라가라 하면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올라가는 길도 험할 뿐 아니라 산꼭대기에는 별 특별한 건물도 없었고, 로마식 기둥 두 개만 보일 뿐이었다.
헤롯은 왜 이런 곳에 여름 궁전을 지었을까?
사실 헤롯은 유다의 변방 남부 이두메 지방의 사람으로서 주류 세력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에 줄을 서야 하고, 누구의 환심을 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 황제 환심을 사려고 자기 나라 전역에 건물과 도시에 황제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기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의 망대를 건축하였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헤롯을 인정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헤롯은 늘 자신의 정권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살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도전적인 모습이 비치면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
성경에도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다 죽여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헤롯은 자기 아들이라도 왕권에 도전할 것 같은 의심이 들면 죽여버렸다.
유대인 부인 미리암 1세에게서 난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러스를 대역죄로 처형하였고, 죽기 직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안티파스를 축출하기도 하였다.
의심과 불안 증세에 시달렸던 헤롯은 언제든 피할 수 있도록 베들레헴의 헤로디온, 사해 서부의 마사다, 그리고 사해 동부의 마케루스 요새에 그의 별궁을 지었다.
마케루스는 해발 700m 정도이긴 하지만, 사해로부터 따지면 1,100m이며, 멀리 이스라엘 땅까지 바라다보일 정도로 천혜의 요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와 사해에서 배를 타고 마케루스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마케루스는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사용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헤롯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다.
그는 첫 번째 아내인 나바티안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을 버리고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결혼하였다.
세례요한은 그러한 헤롯의 작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결국 마케루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었다.
살로메의 춤에 매료된 헤롯 안티파스는 살로메의 요청으로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다.
이후 많은 화가가 이 사건을 형상화하여 그림을 그렸다.
헤롯 안티파스는 후일 예수님이 재판받을 때도 잠시 등장하는데 그는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였다.
세례요한을 죽이기 전까지는 그래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감히 살해하지 못하던 그가 이제 양심의 화인을 맞아 예수님을 모욕적으로 대하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헤롯 안티파스가 AD39년에 죽었을 때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를 위하여 애도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케루스를 뒤로 하고 아르논 계곡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