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세례터를 방문하다.
쿰란을 방문했을 때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영화 속에 세례 요한이 잠시 언급되었다.
마치 세례 요한이 규율을 어기고 쿰란 공동체에서 뛰쳐나가 독자 행동을 한 사람처럼 묘사하였다.
세례 요한은 그의 부모가 노령에 출생하였으므로 그가 광야에 살 때는 부모는 별세했을 것이다.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광야)에 있으니라”(눅1:80)고 하였다.
그러면 누가 요한을 보호했을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에세네파가 제사장의 아들인 요한을 자기들의 규칙에 따라 양육했다고 기록하였다.
물론 확증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부인할 수도 없다.
유대 광야는 지리적으로 예루살렘 동쪽에서 여리고 쪽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이다.
남북으로는 북쪽 벧엘에서부터 남쪽 네게브까지다.
유대 광야는 해발 약 800m~1,000m의 유다 산지에서 해수면 -420m의 사해까지로 고도 차이가 1,200m~1,400m에 이르는 급경사 지역이다.
이곳은 비오는 양이 적어 건조하고 지세가 험준하다.
유대 광야는 오늘날 성경 시대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아직도 유대 광야에는 성경 시대의 목자들처럼 양과 염소를 돌보며 살아가는 베두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다윗이 어린 시절 양을 돌보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시 23편의 배경이 되는 곳도 이곳이다.
또한, 사울을 피해 도피처로 삼았던 곳도 유대 광야다.
이스라엘에 가기 전까지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엄청나게 멀리 도망간 줄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대 광야는 예루살렘 바로 턱 아래 있었다.
유대광야의 남쪽 사해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쿰란의 본거지가 있다.
세례요한은 쿰란 공동체보다 예루살렘에 더 가까이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가까이 있는 예루살렘, 베들레헴, 베다니, 벳바게 등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그는 낙타 털을 가공하지 않은 체 거칠고 뻣뻣한 가죽 그대로 옷을 해 입었다.
이러한 약대 털옷은 엘리야 선지자를 비롯하여 선지자들이 주로 입던 옷이다.
그의 옷차림은 기존 문화에 순응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먹었던 음식인 메뚜기와 석청도 가난한 사람의 음식이다.
오늘날까지 베두인은 메뚜기를 소금에 절여 말렸다가 버터나 야생 꿀에 발라먹는다.
그는 여리고 너머 요단 동편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비잔틴 시대 데오도시우스(AD530)는 사해에서 약 5마일 위에서 주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에 근거해서 성 요한 교회가 세워졌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요단 건너편으로는 갈 수 없었고, 요단 서쪽 편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물은 발을 담글 수도 없을 정도로 누런 흙탕물이었다.
사람들은 실망한 듯 요단 강 주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곳이 정확히 예수님이 세례받은 곳이라는 확증도 없는데 근처에는 교파마다 교회를 세워놓았다.
한쪽 편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준비되어 있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 지방에 흩어져 있는 제사장들이 대략 2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라고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종교를 타락시키는 일에 앞장선 자들이었다.
세례요한도 제사장 계열이었다.
그는 부패하고 썩은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광야의 삶을 선택하였다.
광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만 추구하는 곳이다.
세례요한이 쿰란 공동체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그들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였다.
쿰란 공동체는 시험과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새 회원을 수용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영적 엘리트 의식, 특권 의식을 가졌다.
반면에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며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쿰란 공동체는 회원만을 위한 정결 예식을 행하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다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산다는 의미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쿰란 공동체는 현실 정치를 외면한 체 은둔 생활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현실에 눈을 돌렸다.
요한 설교는 매우 현실 비판적이었다.
그는 듣는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입은 거침이 없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3:7,8)
군인이든, 세리든,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쳤다.
그는 진정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의 선지자적 메시지에 감동하여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불과 6개월의 짧은 사역을 하였지만, 세례요한의 사역은 절대 작지 않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하나도 고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그는 진정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데로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