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시험산 앞에 가다
군에 입대할 때 아버지는 나에게 시 23편을 읽어주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죽음의 위협에서도 너를 지켜주는 주님이 계시니 걱정 말라는 의미의 말씀도 해주셨다.
그날 이후 시 23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님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여 말씀한다.
나는 이스라엘 가기 전까지 목자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지팡이 왼손으로는 어린 양을 품고 있는 그림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지고 한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눈같이 하얀 양들이 뛰노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스라엘을 갔다.
아!!!
현실은 참담하였다.
양들은 얼마나 떼가 꼬질꼬질한지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양떼 목장에 있는 양들은 귀엽고 이쁘기까지 하였는데 이스라엘의 양들은 그야말로 천덕꾸러기였다.
목자라고 하는 사람은 저 멀리 양복바지에 스웨타를 입고 있었다.
지팡이는 아예 들고 있지도 않았다.
하긴 요즘은 양들을 위협하는 산짐승이 없으니 지팡이가 필요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폼으로라도 지팡이는 잡고 있으면 좋았을걸!
유대 광야에 갔을 때 목자의 자녀인지 어린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달려온다.
손에는 조악하게 만든 팔찌를 들고서 1달러 하며 사달라고 한다.
목욕한 지가 얼마 되었는지 모르지만, 손발과 얼굴에는 떼가 꼬질꼬질하다.
예나 지금이나 목자는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는 극빈자들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목축업에서 농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부유한 사람은 땅을 많이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목자들을 고용하여 광야에서 양과 염소를 목축하도록 하였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광야도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목자들은 점점 더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부자는 농사를 짓거나, 혹은 삯꾼 목자들을 많이 고용하여 대규모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다.
보아스는 농사를 짓는 땅 부자였고, 나발은 대규모 목축업을 하는 부자였다.
반면에 다윗의 집안은 자녀들이 나가서 목축을 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비유한 것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그들을 보호하고 품어주는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광야에서 목축업을 하며 하나님만 바라고 소망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는 정착하여 농사지으면서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심은 땅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의 정신적, 영적 지도자라고 할 제사장들마저 세상의 부유함에 자신의 신앙을 팔아버렸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민족정신이라 자부하던 랍비들마저 세속에 물드는 상황에서 에센파들은 과감히 광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스라엘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오실 메시아를 거기서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결혼보다는 독신 생활을 하면서도 400년 동안 에센 공동체가 유지된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현실에 분개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은 은둔자였고, 영적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
현실 상황을 외면하면서 오직 말씀만 묵상하고 기도하며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렸다.
반면에 세례요한은 눈물짓고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과감히 외치기 시작했다.
비록 광야지만 현실을 향하여 소리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엘리트들이 아닌 정말 억압받고 홀대받는 사람들이었다.
세례요한은 기꺼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렇지만 그는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로는 가지 않았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다.
그가 받은 시험 중에 세속의 풍요와 권세 앞에 무릎 꿇으라는 시험이 있었다.
모두가 물질의 신인 바알 앞에 무릎 꿇는데, 그것이 현실이고 잘사는 길인데 너도 무릎 꿇으라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무릎 꿇기는 커녕 오히려 많은 사람을 인도하는 진정한 목자로 일어섰다.
광야에 머무르면서 회개하라고 외치고 세례를 준다고 해서 정작 현실에서 살아가야할 백성들이 믿음으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예수님은 기꺼이 광야를 떠나셨다.
광야보다 더 광야 같은 험악한 세상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셨다.
에센 파들이 극히 싫어하는 성전에도 들어가셔서 장사치들의 물건들을 뒤엎으셨다.
백성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온몸을 온전히 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조용히 말씀 묵상하며 기도 생활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도생활에 힘을 쏟았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은 부엌에서 하찮은 일을 하는 하녀라 할지라도 그녀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녀는 수도원의 그 어떤 수도사보다 훨씬 뛰어난 영성가라는 사실이다.
영성은 외딴 골방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완성됨을 깨달았다.
종교개혁자의 깨달음은 현실의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