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아직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전 아랍의 한 염소 지기가 사해 근처 동굴에서 항아리에 보관되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당시 이스라엘과 아랍은 전쟁중이었고 이 발견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것이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것을 밝혀냈다.
요르단 정부는 동굴을 발견한 베두인들에게 글자가 기록된 면의 1㎤당 2.8달러씩을 받고 사들이기 시작했다.
쿰란의 동굴들은 불법적인 도굴로 훼손되었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전문적인 발굴을 하였을 때는 12개의 온전한 두루마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각으로 찢어져 있었다.
학자들의 노력으로 조각들을 이어붙여 두루마리의 글들을 겨우 판독할 수 있었다.
발굴된 자료들은 예수님 탄생 200년 전부터 AD 200년까지의 다양한 자료들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학계를 뒤흔들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2,200년 전 구약 성경 사본이 발견된 것이다.
그동안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은 기껏해야 1,000년 전 사본밖에 없었기에 AD400년 전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 헬라어 구약성경이 권위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쿰란에서 사본이 발견되므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무려 1000년이 넘는 공백이 있었지만, 2200년 전 구약성경 사본과 1,000년 전 구약성경 사본이 놀랍도록 일치하는 점이 많았다.
결국, 히브리어 구약 성경(맛소라 사본)이 헬라어 구약성경(70인역 사본)보다 훨씬 더 권위 있음이 밝혀졌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의 주인은 에세네파에 속한 쿰란 공동체였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그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던 학자들은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동굴의 사본을 통하여 에세네파의 실체가 2,000년 만에 확실하게 드러났다.
기원전 175년 이스라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4세가 뇌물을 받고 예슈아(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야손이 죽은 후 메네라우스는 사제 출신도 아닌데 역시 뇌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가 이처럼 부패하자 그동안 제사장 가문으로 정통성을 가진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은 반발하였다.
그들은 이사야 40:3을 근거로 광야에 은거하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광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부패한 예루살렘 제사장 계열인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보다 훨씬 더 완고하고 보수적이었다.
에세네파는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속세를 떠나 광야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다.
2년의 수습 기간을 거쳐 입회가 허락되면, 재산을 공동체에 헌납하고 공동생활을 하였다.
에세네파는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정결 예식을 수시로 행하였다.
그들은 강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영적 엘리트였다.
이들의 가장 뛰어난 활동이 바로 성경 필사와 주해 작업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해 사본이다.
결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독신자로서 경건 생활에 힘썼다.
결혼도 하지 않고 400년 넘게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입양이나 이스라엘 사람 중 경건한 자들이 끊임없이 가입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세례요한의 성장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광야)에 있으니라"
학자들은 세례요한도 부모가 나이 많아 죽고 쿰란 공동체에 입양되어 살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