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이 없다. 성경시대의 예루살렘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기념 교회당만 가득하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바늘구멍 하나 꽂을 땅도 없이 온갖 종파와 교파들이 기념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어디 조금 특이한 바위 하나만 있어도, 어디 조그만 동굴만 있어도 온갖 의미를 붙여놓고 기념교회를 지었다. 나는 그런 교회를 줄 서서 들어가 구경하는데 신물이 났다.
서기 70년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졌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기에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하고자 예루살렘을 떠나갔다. 예루살렘을 떠나간 기독교인 중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은 수백 명도 되지 않았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까지 예루살렘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교도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였다.
교부 제롬(Jerome, 340~420)에 의하면, 그 당시 예루살렘엔 기독교인은 없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잊혀진 도시였다.
그동안 예루살렘에는 그리스 신전들이 자리하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권력자들은 대거 교회로 몰려왔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건축을 통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한 권력자들이 기독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AD320년에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헬레나를 안내하던 사람이 정확한 고증이나 검토도 없이 "여기가 예수님 무덤 터입니다. 여기가 예수님 승천하신 곳입니다. 여기가 예수님 태어나신 곳입니다.” 말하면, 헬레나는 그곳에 교회를 짓게 하였다. 당시 예수님 무덤 터라고 하는 곳은 이미 비너스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너스 신전 밑에 예수님의 무덤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다 훼손된 후였다. 그런데도 헬레나의 명령에 따라 성묘 교회(Holy Sepulcher)가 건축되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 자리도 아도니스 신전이 있던 자리다. 결국, 아무 증거나 확증도 없이 기존에 있던 그리스 신전을 부수고 기념 예배당을 지었다. 감람산에는 예수 부활 승천 교회(Church of the Mount of Olives)가 세워졌다.
전설은 그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헬레나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자 그녀가 사실 예수님이 진짜 지셨던 십자가를 한 유대인의 도움으로 찾아냈다는 풍문이 돌았다. 풍문은 사실로 바뀌었고, 풍문은 전설이 되었다. 300년이 지나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를 찾았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로마 가톨릭은 신화를 만들었다. 헬레나의 전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몸에 박힌 못 중 2개를 찾아서 하나는 황제의 왕관에, 또 하나는 황제가 타는 말고삐로 쓰게 했다는 것이다.
헬레나 황후의 뒤를 이어 로마의 무수히 많은 귀족과 부자들, 권력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같은 형태의 짓거리를 하였다. 요르단의 기독교 도시 마다바(Medeba)에 가면 6세기경에 지어진 그리스 정교회가 있다. 그 건물 바닥에 6세기경의 모자이크 지도가 있다. 그 지도에는 비잔틴 시대 이스라엘 곳곳에 세운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이 그려져 있다. 헬레나 이후 이스라엘에 교회와 수도원이 몇 개나 들어섰는지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기념 교회 짓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우상화 작업은 십자군 전쟁 시대 이후 더 확산되었다. 새로운 천 년을 맞으면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곧 심판의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비잔틴 시대에도 성지순례가 있긴 했지만, 십자군 시대에 더욱 활발하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다. 그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십자군이라는 성지순례에 참여함으로 구원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과 관련된 물건을 하나라도 발견하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1098년 십자군에 참여한 병사 하나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창을 발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사람들은 그걸 믿었다. 성물에 대한 조작 사건은 중세시대 유행이 되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뼛조각이라도 하나 가지면 연옥에서 100년 동안 받을 고통이 사해진다고 믿었다. 베로나의 페트루스(Petrus von Verona)의 손가락뼈는 35개 조각으로 잘려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1238년 비잔틴 황제 볼드윈 2세는 예수가 썼던 가시관의 일부를 프랑스 루이 9세에게 13만5천 리브라에 팔았다. 당시 기사의 1년 급료가 15리브라였으니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중세 가톨릭은 성지순례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땅을 한 번만이라도 밟아보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편지를 썼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진정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바울은 가르쳤다. 초대교부들도 바울의 생각을 전적으로 따랐다.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 크리소스톰(Chrysostomus, 349~407),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ous of Nysa, 335~394) 모두 성지순례에 대하여 극히 부정적이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복 받을 자들을 천국으로 불러 올리실 때,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건 선행으로 꼽지 않는다. 그런 유명한 곳을 찾아서 얻는 바가 무엇인가? 어떻게 성령이 예루살렘엔 넘치지만, 이방인의 땅은 너무 멀어 못 간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장소에 따라 하나님께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고 할 수 없다. 당신이 어디 있든지,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만 만든다면 그분은 당신께 갈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 사악한 생각이 가득하다면, 당신이 골고다 언덕에 있든, 올리브 산에 있던 당신은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의 공인성경인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제롬 역시도 성지순례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그는 신앙의 열쇠는 특정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믿음과 행동에 있다고 가르쳤다. 특별히 미신이나 다름없는 성물숭배에 대해 경계를 하며 순례자들이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성지순례라는 형태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성지로 생각하고 순례하고자 하는 무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무 증거도 없고, 증명도 되지 않는 바위에 온갖 의미를 붙여 놓고서 그 앞에 무릎 꿇고, 만지고, 키스하는 무리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우상숭배하는 모습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예루살렘엔 예루살렘이 없다. 만약 이스라엘을 방문한다면 그것은 지리적, 문화적, 기후적 풍토를 익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탐방 여행이 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