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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Mar 24. 2016

예루살렘은 통곡의 도시다.

통곡의 벽에서

1. 로마는 피지배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는 정책으로 세계제국을 유지하였다. 유대에 대해서도 역시 관용정책을 펴서 유대 자치기구(산헤드린 공의회)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칼리굴라 황제는 자신을 신으로 칭하고 제국 전역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도록 하였다. 유대의 제사장들은 이미 권력에 길들어 로마의 정책을 따랐지만, 일부 급진파들은 로마의 정책에 반발했다. 과도한 세금에 짓눌려 살던 유대인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급진파에 의해 반란은 시작되었다. AD70년 로마의 티투스는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25,000명의 유대 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8만이 넘는 로마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수도 없는 유대인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려나갔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하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 하게 하였다. 

2. AD132년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 벤 요셉은 시몬 바르 코크바를 대장으로 로마에 다시 한 번 저항하였다.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인의 할례를 금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성전산에 주피터 신전을 세운 것 때문에 로마에 대한 반감은 고조되고 있었다. 유다 전역에서 일어난 항전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하드리아누스는 세베루스를 지휘관으로 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4년여 전쟁 끝에 58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50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 추방하였다. 유대 땅은 황무지가 되고 그곳은 아랍인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유대라는 이름 대신에 팔레스타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추방되었다. 

3. 오직 1년에 딱 한 번 히브리 달력으로 아브 월 9일에 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성전산에는 주피터 신전과 함께 황제의 동상 2개가 세워졌다. 예루살렘은 그 이름이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뀌었다. 방문 금지령이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파수병에게 뇌물을 쓰면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만일 허락이 안 되면 예루살렘 성이 바라보이는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였다. 그들은 로마가 무서워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왔다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4.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311년 이후 비잔틴 기독교는 유대교를 더욱 철저하게 박해하였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전역에는 기념 예배당과 수도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법적인 권한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유대인이 모일 수 있는 회당은 철저히 파괴하였다. 유대인들은 아브 월 9일이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뇌물을 써서 폐허가 된 성전 가까이 다가가 애도의 노래를 부르며 메시아가 오기를 기도했다. 

5. AD638년 아랍의 오마르 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너무 기뻐 춤을 추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까지 460년 동안 유대인들은 세금만 내고 법만 잘 지킨다면 종교의 자유도 가질 수 있었고, 지도자를 뽑아 자치사회를 꾸려나갈 수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서쪽 벽에 찾아와 기도하기 시작했다.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슬람 사원이 두 개씩이나 들어서자 그들은 성전 산 아래 서쪽 벽에서 구슬피 기도하였다. 

6. 10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회복되면서 다시 유대인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학살당하거나 강제 추방되었다. 400년 이상 누렸던 그들의 터전은 모두 빼앗겼다. 예루살렘은 다시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다. 

7.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당신의 자비 속에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루속히 영원한 도시를 다시 건설하고, 다윗 왕가를 다시 세울 수 있게 하소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나서야 시편 저자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137:5,6 공동번역) 

8. 1187년 이슬람의 살라딘(Saladin)이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감사하였다. 1260년에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1516년에는 터키의 살림(Sallim)이 예루살렘을 차지하였다. 1537년부터 1542년 사이 술레이만(Shuleiman)은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을 건축하였다. 약간의 변화가 있긴 해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살 수 있었다. 

(사진 : 윤금숙 권사)

9. 서양에 흩어져 살며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Kabbalah)에 빠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카발라 지도자인 샤베타이 즈비(Shabbetai Tzevi)는 1666년 구원이 있을 거라며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전 재산을 팔아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길을 떠났는데 그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유대인이 죽었다. 운 좋게 이스라엘에 도착한 이들은 너무 힘들어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간 자가 허다하였다.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은 핍박의 역사만큼이나 널리 퍼져 나갔지만, 언제나 비극으로 끝났다. 

10. 이슬람 지배하에서 평화롭게 살던 유대인들과 아랍이 갈등하게 된 것은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2000년 동안 눈물 흘리며 남몰래 기도하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질 때가 왔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였다. 1897년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헤르츨은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 참석하였지만, 점차 전 세계 유대인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 영국으로부터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지지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1925년 3월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천 명이었으나, 1933년에는 23만 8천 명으로 증가하였다. 갑작스러운 유대인의 증가는 아랍인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시온주의는 더욱 불붙게 되었다. 

(사진 : 윤금숙 권사) 

11. 이슬람과 유대인의 갈등은 서쪽 통곡의 벽에서 자주 발생하였다. 평소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의자와 책상을 가져왔으나, 아랍인들은 이제 그것마저 경계의 눈으로 보았다. 유대인들이 서쪽 벽에 회당을 지을 것이라는 루머가 퍼졌다. 그뿐만 아니라 통곡의 벽 위에 있는 바위 돔 사원을 무너뜨리고 3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통곡의 벽에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1922년 아랍인들은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조직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던 유대인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예루살렘은 아랍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 아랍은 전쟁을 선포하였다. 아랍과 이스라엘은 생존을 걸고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국제기구에서의 중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2. 1967년 6일 전쟁에서 대승을 한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현재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장소이며 국가적인 큰 행사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통곡의 벽에 찾아와 기도하고 있다. 통곡의 벽은 반으로 나누어 남쪽은 여자들이, 북쪽은 남자들이 기도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유대인이 한마음으로 기도한다. 

13. 유대인들은 무어라 기도할까?  11세기 말 십자군 정복 직전에 쓴 유대인의 기도문이 하나 있다. 

“나의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보호하사 생명과 힘을 주시어 이제 이곳에 와서 당신의 성전 터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린 모두 성전이 다시 세워져 그 그늘 속에서 쉬고 그 먼지 속에 몸을 누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하인을 모시는 종복(從僕) 밖에 안 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영광스럽게도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소원대로 이곳에 와 성전 터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다 무너지고 없지만, 아직도 당신의 거룩한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이곳을 망가뜨렸지만, 주님의 존재와 약속 덕에 이곳은 고결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은 허락해 주시지 않고 있지만, 약속하신 대로 언젠가 우리에게 이곳을 돌려주시어 다시 세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토라를 읽고 있는 유대인

14. 마침내 저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2천 년 동안 유대인들의 마음에 쌓인 분노와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슬람과는 언제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긴장관계 속에 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 역시 노골적이다. 만일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되며, 유대인 가족 묘지에도 묻히지 못한다. 때로 기독교인과 연락하지 말라는 랍비의 명을 어긴 유대인은 감옥에 가거나 채찍질을 당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에는 언제 통곡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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