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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2. 2016

사도 바울의 감옥생활은 어떠했을까?

신약 성경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는 시간 간격이 무려 2,000년에 달한다. 민족과 언어가 같은 한 나라에서도 2,000년의 간격이 있다면, 문화와 풍습이 달라도 너무 다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문화와 지리의 간격뿐만 아니라 시간을 간격을 뛰어넘을 줄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빌립보 감옥

그중에 하나가 감옥이다. 오늘날 감옥은 형벌의 하나로서 교정과 교화를 목표로 한 사람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감옥은 형벌의 의미가 없었다. 감옥은 단지 범죄자를 재판하여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가두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재판받을 때까지 범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조치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야만인과 달리 로마인인 경우는 많은 편의를 봐주어서 가택 연금이나 병사를 대동하고 밖에 잠시 외출도 가능하였다. 물론 야만인인 경우는 때로 정식 재판을 받지도 않았는데 고문을 가하고 매를 때리는 일도 있었다.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가 로마인이라고 명백히 밝히기 전에는 유대인(야만인)으로 취급하여 감옥에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로마인임을 명백히 밝힐 때는 처우가 달라졌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불문곡직 때리기 시작하였다. 바울로 인한 소동을 로마의 천부장(호민관)에게 보고하고 호민관은 급히 내려가 바울을 잡았다. 호민관은 바울이 로마인인 줄 모르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고 채찍질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바울이 외쳤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22:25)

호민관은 놀라 그를 풀어주고 사건의 정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호민관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것을 알고 그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당시 유대 열심당원들이 바울을 암살할 계획을 알고 그는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병 200명으로 바울을 호위하여 가이사랴로 호송하였다. 

가이사랴 (사진 : 윤금숙 권사) 

가이사랴에서 재판받는 바울도 벨릭스 총독 앞에서 당당하였다. 비록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여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행동의 제약을 받거나 고문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벨릭스와 그의 부인 드루실라에게 복음을 수차례 설명하였다.  재판에서 정식으로 유죄가 인정되기 전까지 그는 비교적 자유로운 가운데 지낼 수 있었다. 

가이사랴 (사진 : 윤금숙 권사)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는 말도 오늘 우리 식의 감옥을 생각하면 안 된다. 심지어 바울은 2년 동안 셋집을 얻어 있기도 하였다. (행28:30) 그가 가이사랴에서도 2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았다. 단지 총독 벨릭스와 그 후임으로 온 베스도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기록할 뿐이다. 

가이사랴 (사진 : 윤금숙 권사)

나는 여기서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았다. 가이사랴에는 일찍이 빌립 집사가 선교했던 곳이고,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곳이다. 따라서 가이사랴에 기독교인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날 때마다 꼭 가이사랴를 들린 이유도 바로 거기에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도 빌립집사가 그를 맞이하였다. (행21:8)

가이사랴 (사진 : 윤금숙 권사)

바울이 2년 동안,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받기는 했겠지만, 로마에서처럼 그는 비교적 자유롭게 가이사랴의 기독교 공동체를 방문할 수도 있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재판받기 위하여 로마에 들렀던 바울도 전셋집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행28:23,31) 가이사랴에서도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중단이 없이 계속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이사랴 (사진 : 윤금숙 권사)

비록 행동의 제약은 조금 있었겠지만, 그리고 재판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어 판결이 어떻게 떨어질지 걱정했겠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전파할까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것이 바울의 삶이었다. 나는 전에 설교할 때에 바울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파했다고 설교함으로 바울의 위대함이나 영웅적 모습을 극대화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사실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단지 행동의 제약만 있었을 뿐, 로마에서 2년 가이사랴에서 2년 있는 동안 죽음의 공포를 느낄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행동의 자유가 없다고 해서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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