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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2. 2016

예수님은 몇 개 국어를 할 줄 아셨을까?

현재 이스라엘의 공용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다.  

그리고 상업과 관광분야에서 영어를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처음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다양한 언어적 배경을 가지고 모였다. 

그중에 히브리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때 언어학자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줄 단단한 연결고리로 히브리어를 생각했다. 

2,000년 동안 쓰지 않던 언어를 사용하자는 벤 예후다의 주장에 사람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 보수주의 유대인들은 거룩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일상생활에서 쓴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성경에서 히브리어 단어들을 최대한 추려내고 성경에 없는 단어는 영어에서 빌려와 히브리어 사전을 만들었다. 

벤 예후다의 노력으로 마침내 히브리어는 다시 살아났고 이스라엘의 공용어가 되었다. 

벤 예후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다국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4개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을 점령한 로마는 공식 문서에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결국, 국제적 상거래에 널리 사용되는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평민들은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회당에서 성경을 읽을 때는 히브리어를 사용하였다. 

예루살렘의 명동거리인 벤 예후다 거리

BC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BC538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유대로 돌아가도록 칙령이 발표되었지만, 모든 유대인이 돌아간 것은 아니다. 

몇십 년 동안 바빌론에 터를 닦고 살던 사람 중에 상당수가 바빌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집트로 끌려갔던 유대인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바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성경에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다. 

지금도 외국에 이민을 간 1세대와 2세대 간의 언어적 간격과 문화적 간격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세대가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점점 처음 1세대들이 가졌던 종교와 언어와 문화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히브리어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전 세계를 정복한 그리스 영향권 아래에서 헬라 문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단지 유대교를 믿었을 뿐 그들은 완전히 헬라 문화에 동화되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던 사람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유대문화를 철저하게 지키고 보전했을까?

마카비서에 보면, 예루살렘이 얼마나 헬라화가 되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곧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라 예루살렘에 운동장을 세우고 할례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폐기하고 이방인들과 어울렸다.”(마카비 상 1:14-15)

“그는 요새 도시의 성 바로 밑에 경기장을 재빨리 건축하고 가장 우수한 청년들에게 그리스식 모자를 쓰게 했다. 이렇게 불경건한 사이비 대사제 야손의 극심한 모독적인 행위로 그리스화 운동은 극도에 달하였고 이국의 풍습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마카비 하 4:12-13)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대도시의 헬라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헬라 사람들과 함께 목욕할 때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할례받은 흔적을 지웠다니 그 정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갈릴리

그렇다면 갈릴리와 같은 시골 지역의 헬라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시골은 도시보다 유행에 덜 민감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도시의 헬라화를 싫어하고 경계하였을까?

예수님이 자라나셨던 나사렛은 가이사랴와 디베랴의 중간 지대에 있다. 

가이사랴와 디베랴는 모두 신약시대에 세워진 도시다. 

가이사랴는 헤롯이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하여 세운 항구도시였고, 디베랴는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가 로마의 황제인 티베리우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세운 휴양도시였다. 

가이사랴는 당대 최고의 국제항으로서 세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디베랴는 고대 도시가 갖추어야 할 주요 요건들을 골고루 간직하였다.

이 도시는 아름다운 갈릴리 호수와 온천이 있어서 부유층들이 휴양하러 몰려들었다. 

디베랴의 영향력 때문에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갈릴리의 중심도시인 세포리스도 가까이 있는데 세포리스는 명백히 헬라도시다. 

디베랴 (사진 : 윤금숙 권사)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 벳세다, 가버나움, 가나, 고라신 같은 동네에 가셨다는 기록은 있어도 가이사랴나 디베랴, 세포리스에 가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갈릴리 마을들은 지중해와 다메섹을 이어주는 무역로를 따라 발달한 마을들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들은 외국인의 왕래가 잦았고, 분명 갈릴리의 가장 큰 도시인 디베랴에도 많은 외국인이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사9:1)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아서 갈릴리 지역은 예전부터 이방인이 많이 거주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갈릴리 지역에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갈릴리 (사진 : 윤금숙 권사) 

최고의 문명과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가이사랴와 디베랴 사이에 있는 갈릴리는 여타 시골 마을과는 다르게 헬라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들을 만난 경우가 종종 있다. 

헬라인이 빌립에게 청하여 예수님을 뵙고자 청하기도 하였다. 

유대의 총독 빌라도와 대화할 때도 분명히 헬라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일반적인 평민들이 사용하는 아람어와 회당에서 사용하는 히브리어와 당시 국제적인 언어인 헬라어는 분명히 할 줄 아셨다. 

다만 라틴어는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이 극소수였고, 실질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틴어를 사용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갈릴리 (사진 : 임한중 선교사)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다국어 문화권이었고, 그러한 문화 속에서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은 히브리 문화를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갈등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다고 선언한 것은 신학적인 맥락을 빼더라도 그 사회적인 상황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선언이었다.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여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cf 갈3:28, 골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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