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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09. 2016

아름다운 갈릴리 호수를 거닐며

디베랴에서

우리는 가나를 떠나 디베랴로 향했다.

고개를 넘어 갈릴리 호수가 보이자 버스에 탄 모든 사람이 탄성을 터트렸다.

쪽빛 호수는 잔잔하였고, 날씨는 청명하였다.

갈릴리 호수는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그동안의 피로에 지친 우리를 품어주었다.

여기서 며칠 푹 쉬었다 가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날씨가 조금 쌀쌀하긴 하였지만, 아이들은 호숫가에 있는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신이 나 있었다.

갈릴리 호수가 안겨주는 이 편안함과 위로에 사람들은 감사하였다.

호수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사람,

다정히 손잡고 호수를 거니는 부부,

아름다운 갈릴리를 담기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

모두 행복하다.

(사진 : 임한중 선교사)

호텔은 디베랴 도심 제일 북쪽 막달라와 가까운 곳에 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난 호수길을 따라 산책을 하였다.

주님이 걸어가셨을 법한 갈릴리 호수길을 걷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

저절로 감사 찬송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머무는 디베랴는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도시다.

AD 20년 헤롯 안티파스가 고대 도시의 폐허 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디베랴는 기본적으로 헬레니즘적 도시를 지향하였다.

디베랴 남쪽으로 2km아래에 온천이 있어서 휴양하기 좋은 곳이다.

헤롯은 자기 아버지를 본받아 정열적으로 도시 건설을 하였다.

대규모 건축공사는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큰 몫을 감당하였다.

수많은 건축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일하였다.

짐작건대 예수님도 여기서 일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진 : 임한중 선교사)

더군다나 갈릴리는 물이 풍족하며 기후가 온화하고 땅이 매우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갈릴리를 거대한 정원과 같다고 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밀 등 곡식들과 올리브 기름, 과일, 채소, 포도주, 대추야자 등 농산물이 아주 풍성하게 생산하였다.

물론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하여 16개 도시가 발달하면서 어업과 물자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진 : 윤금숙 권사)

도시가 세워지고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이 갈릴리 지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인구의 증가는 식량 생산의 증가를 가져왔고, 더불어 세금도 많이 걷히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건축 사업에 재투자하는 경제의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제 부흥은 팍스 로마나라는 평화 체제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 치세의 갈릴리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디베랴 건축이 완료되면서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비대해진 관료 정치와 새로 세워진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세금이 징수되었다.

경제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지만, 부귀와 향락에 취한 귀족층들은 멈출 줄 몰랐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갈릴리는 대리석, 호화로운 사치품, 다양한 향료를 수입하였다.

문헌 연구에 따르면, 바빌론으로부터는 맥주를, 이집트로부터는 훈제 물고기와 보석과 양피지 및 파피루스를, 비두니아로부터는 치즈를, 스페인으로부터는 고등어를, 리디아로부터는 수입 포도주와 당나귀를, 두로에서는 자줏빛 염료를 수입하였다. 1)

더욱이 헤롯 안티파스가 사촌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하여 왕비인 나바티안 공주와 이혼하였다.

그동안 나바티안 왕국과 좋은 무역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나바티안 왕국이 무역에 발을 빼면서 갈릴리 경제는 더욱 휘청거렸다.

경제가 몰락하면서 빈부 간의 갈등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백성들의 삶은 점점 고단하여져 갔다.

(사진 : 윤금숙 권사)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부자들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말씀들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막10:2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

세금과 관련된 말씀들 (눅20:19-26)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눅16:1-8)

과도한 부역의 문제(마5:41)

빚진 자의 비유 (마18:23-35)

(사진 : 윤금숙 권사)

이러한 경제적 불균형 속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마침내 폭발하여 로마에 무모한 항전을 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패배하였고 나라는 폐허로 바뀌었다.

그러나 디베랴는 천혜의 입지적인 조건 때문에 계속 발전하여갔다.

디베랴는 유대 랍비들이 주로 활동하는 거점 도시가 되었고, AD 200년경에는 미쉬나가 이곳에서 완성되었고, AD 400년경에는 팔레스틴 탈무드가 완성되었다.

AD 8, 9세기에는 디베랴에 있는 유대 학교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잊혀 가는 히브리어에 모음찍는 법을 확립하였다.

사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띄어쓰기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히브리어를 사용할 때는 아무 문제가 안 되었지만, 히브리어를 할 수 없게 되니 발음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디베랴 학교의 랍비들은 그동안 모든 히브리 사본을 신중히 연구한 끝에 작은 점들과 대시 기호들(-)과 모음점을 사용하여 하나의 발음 체계를 만들었다.

이들이 바로 마소라(Masora : 전통이라는 뜻)라 불렸고, 자신들의 전통을 강하게 주장하는 학자들이라고 해서 마소라 학자(Masoretes)로 알려졌다.

이들이 만들어 낸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공인을 받고 지금까지 사용되는 히브리어 구약 텍스트가 되었다. 2)

(사진 : 임한중 선교사)

이슬람 지배하에서도 디베랴를 중심으로 유대 랍비들은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19세기 말에 시온주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디베랴는 더욱 확장되었다.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함께 시작된 중동전쟁은 디베랴를 위기에 빠트렸다.

북쪽의 레바논과 시리아는 골란고원에서 매일같이 폭격을 가하여 도시는 점점 파괴되어갔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골란 고원을 점령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디베랴는 다시 개발되어 현재의 휴양 산업 도시가 되었다.

(사진 : 윤금숙 권사)

나는 비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다 글 한 줄 쓰며 오랜만에 정신적 여유를 누렸다.

아직도 수영장에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신나게 떠들고 있다.


주(註)

1) 신약성서의 경제윤리, 신약논단 제4권, "갈릴리 경제학 - 예수 운동의 해석학을 위한 사회 계층론적 이해, 조태연(이대) 62쪽 이하 참고" 한국신약학회 편, 한들

2)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 G 허버트 리빙스턴, 김의원 역, CLC,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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