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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0. 2016

목숨을 걸고 싸운 전쟁터 골란 고원

헐몬산과 바산 지역을 바라보며

2000년 동안 나라없는 설움을 살던 유대인들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서뱡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 유대인들을 핍박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잃어버린 고향 땅 이스라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땅은 이미 아랍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다.

유대인들은 아랍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네게브 사막과 광야의 땅을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하였다.

아무도 살수 없는 그 땅에 집을 짓고 살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랍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자기들의 땅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써 사모았던 땅도 이런저런 이유로 빼앗기기 일쑤였다.

골란 고원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국제 정세의 빈틈을 파고들어 마침내 이스라엘의 건국을 이루었다.

1948년 5월 14일(금)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에서는 ‘하티크바(Hatiqva, 희망)라는 국가가 불려지고 초대수상 벤 구리온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유엔은 이스라엘의 해안가와 갈릴리 일부, 네게브 사막을 이스라엘 땅으로, 그리고 요단강을 중심으로 알토란 같은 땅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양분하여 독립을 허락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아랍은 이러한 결정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랍 연합군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마자 곧바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는 40만명에 직업군인은 2000명, 그리고 3-4일 군사훈련을 받은 군대 지원자 만명의 군대가 전부였다.

반면에 아랍쪽 군대는 일단 숫자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해방군 1만 2천명

요르단군 1만 2천명

이르크군 2만 1천명

이집트군 4만명

시리아군 1만 2천명

레바논군 3천 5백명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맨군 800명

도합 10만 1천 3백명이었다.

열배가 넘는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수상이었던 벤 구리온은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아랍이라는 대의 명분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아랍 연합군의 대표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르단 국왕 압둘라였다.

그는 단숨에 요단강을 건너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므로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사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참전을 결정한 것도 요르단의 이러한 야심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벌어진 후 자신들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자 전쟁 후 누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할 것인가 서로 견제하느라 자기 편끼리 싸움을 일삼았다.

서로들 의심하고 견제하느라 진정한 전쟁은 할 수 조차 없었다.

결국 전쟁은 엉뚱하게도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에 이주하였다.

이스라엘은 적국들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된 나라를 갖추기 위하여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노력을 하였다.

군대를 정비하고, 최신 무기를 수입하고, 정보 조직인 모사드를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갈릴리 북동쪽이 골란 고원지대이다.(노란색)

그사이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작고 큰 공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골란고원을 차지한 시리아 군은 서남쪽 이스라엘 지역을 향하여 매일같이 대포를 쏘아댔다.

그때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헨(Elie Cohen)이 등장한다.

그는 시리아계로서 아르헨티나에서 가구무역을 하며 엄청난 재산을 모은 사업가로 위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적절한 이유를 들어 시리아 군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 공세를 하였다.

먼저 부인들에게 귀금속 선물을 하면서 접근하였고, 군 요직의 사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면 “전 사업가라서 그런 이야기 들으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릅니다.”하고 순진한 척 하였다.

엘리 코헨을 의심하지 않은 시리아 군은 자신이 얼마나 실력자인지 우쭐한 마음에 골란 고원의 군사 배치도와 이스라엘 공격 계획을 다 알려주었다.

알 하페즈 시리아 대통령은 엘리 코헨을 차기 국방상으로 임명할 생각까지 하였다.

절대 비밀지역인 골란 고원을 제집 드나들듯 다녔던 엘리 코헨에게 시리아 군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별다른 삼림이 없는 고원지역에 군 부대와 장비를 어떻게 숨길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그때 엘리 코헨은 유칼립투스 나무를 수입하여 심고 거기에 군 장비와 부대를 숨기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어리석은 시리아 군은 그의 조언대로 호주에서 유칼립투스를 수입하여 심고 군 부대를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지금도 골란 고원을 방문하면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1967년 6월 7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세 나라는 연합하여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첩보 조직을 통하여 이러한 정보를 수집한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유명한 6일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우월한 공군력으로 세나라의 군사 기지들을 공격하였다.

엘리 코헨을 통하여 얻은 정보는 골란 고원을 정복하는데 아주 유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유칼립투스 나무만 쪽집게 찝어내듯이 공격하여 시리아 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골란고원과 요단강 서쪽 지역과 시나이 반도를 차지하였다.


이스라엘에게 대패한 세 나라는 절치부심 다시 전쟁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쓴 맛을 본 요르단은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결정함으로 시리아와 이집트 양국이 기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이른바 욤 키푸르 전쟁이다.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진다.

반면 이슬람은 라마단 기간으로서 그들 역시도 금식하며 알라에게 기도하는 시기로서 아무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때다.

1973년 10월 6일 대속죄일, 시리아는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6일 전쟁때 빼앗긴 골란 고원을 되찾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하여 남쪽에서 공격하였다.

양쪽으로 공격받는 이스라엘은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시리아 국경지대를 인접한 유엔존(빨간 선)

골란 고원을 공격하는 시리안 군의 규모는 대단하였다.

3개 사단 2만 8천명의 병력과 600문의 포와 800대의 전차였다.

공격 이틀째 2개 기갑사단 전차 500대가 추가로 투입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군은 3개 여단의 3천명의 병력과 60문의 포와 180대의 전차 뿐이었다.

엄청난 화력으로 기습 공격하는 시리아 군에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골란 고원을 지키던 이스라엘 군 장교의 90%가 전사하였다고 하니 그 싸움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절대적인 열세속에서 지원군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며 시간 벌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때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이 등장한다.

21살의 중위 쯔비카 그린골드(Zvika Greengold)다.

소속부대도 없이 대기 발령 상태이던 그는 전쟁이 벌어지자 무작정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합류할 부대도 없는 그는 지휘관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병들을 끌어모아 전차 부대를 형성하여 시리아 전차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백발백중의 솜씨로 시리아 전차들을 파괴해 나간 그는 이스라엘 최고의 전쟁 영웅이 되었다.

지원군을 정비하여 보내는데 24시간 걸릴 것이라고 예측한 시리아 군대의 판단을 뒤엎고 이스라엘은 15시간만에 지원군을 급파하였다.

마침내 시리아군을 격퇴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확실하게 차지하였다.

골란 고원의 유엔존에서 평화를 지키는 유엔군

골란 고원의 원주민은 드루즈(Druze)인으로서 이슬람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와 드루즈교를 믿고 있다.

이들은 모셀렘에게서도 핍박받는 자들로서 현재 이스라엘 시민권을 획득하여 골란 고원에 살고 있다.

더욱이 시리아 내전 상태로 나라가 피폐해지고, 종교적으로 박해받는 드루즈인들은 아무도 시리아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있다.

현재 골란 고원은 유엔 평화군이 지키며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전쟁을 막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비록 시리아가 골란 고원을 돌려달라는 외교전을 벌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땅을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다.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일단 전략적으로 골란 고원은 매우 중요하다.

골란 고원에 올라가면, 북쪽으로 시리아와 레바논 남쪽으로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군사 요충지다.

시리아가 골란 고원을 장악했을 때 수시로 쏘아대는 대포 공격에 곤욕을 겪었던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골란고원에서 포를 쏘면 갈릴리 지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뿐만 아니라 골란 고원과 헤르몬 산에서 흘러내리는 엄청난 물은 이스라엘 식수원의 50%를 차지한다.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하여 그 물줄기를 막으려고 하였다.

지금도 요르단 쪽에서 사해쪽으로 흐르는 강에 댐을 설치하므로 일년에 사해바다 수심이 1.4미터씩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물부족을 절감하는 이스라엘로서는 골란 고원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멀리 헐몬 산이 보인다.

그리고 골란 고원은 고원이긴 하지만 땅이 비옥해서 예로부터 ‘소들이 살찌는 곳’으로 유명하다.

에스겔 39:18에는 '바산의 살진 짐승 곧 숫양이나 어린 양이나 염소나 수송아지를 먹듯 할지라’는 말처럼 바산은 비옥한 땅으로 밀과 포도생산이 풍부하다.

지금도 골란 고원을 가다보면 여기 저기 방목한 소와 포도밭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땅을 차지한 바산의 왕 옥은 견고한 나라를 이루며 이스라엘을 괴롭히기에 시편 22:12절에서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 쌌으며”하였다.

바산의 힘센 소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바산 골란 지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모세가 모압과 암몬을 피하여 바산까지 올라가 바산과 시혼의 왕을 진멸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아모리 족속들이 있었던 이 땅을 여호수아는 단과 므낫세 지파에게 배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멀리 바라보이는 헤르몬 산은 눈 덮인 산으로 고대로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헤르몬 산은 백두산처럼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헤르몬 산을 때로는 시온 산이라 부르며 하나님이 거하시며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는 산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헤르몬 산에서 발원하는 물은 요단강으로 흘러들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수를 공급해준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3)

언제 다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 골란 고원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탱크 잔해로 만들어 놓은 조각품들은 이곳이 전쟁터였음을 상기시키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도록 가르치는 정신교육장 역할을 한다.

나는 멀리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기도하였다.

하나님 헐몬의 이슬이 이곳 모든 땅, 모든 나라에 복을 내려서 영생의 축복, 생명의 축복이 있게 하셔서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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