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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3. 2016

용서는 구원의 도덕이다.

다윗과 압살롬(삼하14장)

월터 브루그만은 그의 책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상태를 마치 바빌론 포로기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1)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도덕과 사고방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영적인 사고방식은 점점 힘을 잃어버리고 상식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인간적 사고방식에 굴복하고 있다. 


기도할 때, 예배드릴 때는 누구나 다 그리스도인 같아 보인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에는 하나님의 시각보다는 합리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인간적인 판단만 고집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서다. 용서는 훌륭한 일이다. 성경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막상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상황에 부딪히면, 우리는 논리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만다. 누가 용서라는 말만 꺼내도 화가 나서 견디지 못 한다. 

“당신도 내 상황이 되어봐라!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알면 그런 소리를 못할 거다. 

내가 용서하면 정의는 누가 세우냐?"

그는 용서하지 말아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수백 가지라도 댈 수 있다.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자리할 곳이 없어진다. 

다윗의 집안이 그러하였다. 큰아들 암논은 동생 압살롬의 인기를 참고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압살롬에게 치명타를 입히려고 그의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였다. 그의 목적대로 압살롬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복수하기 위하여 2년 동안 칼을 갈면서 때를 기다렸다. 누군가 압살롬에게 가서 큰 형을 용서하라고 말했다면, 그는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화를 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요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형 암논을 살인하였다. 


다윗은 형제들의 갈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큰 형 암논을 불러서 크게 야단치고, 당시의 법대로 다말과 결혼시켰더라면, 아마도 문제가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주저하던 다윗은 문제를 풀어낼 시기를 놓치고 결국, 피바람이 자식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압살롬은 외가인 그술 왕국으로 도망가버리고 세월은 또 3년이 지나갔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삼하14:1)

여기 향한다는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어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윗의 갈등을 요압이 알아차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계략을 짜내었다. 전에 나단 선지자가 이야기를 꾸며서 다윗의 간음죄를 지적한 것처럼, 이번에는 한 불쌍한 과부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꾸몄다. 드고아에서 온 과부는 매우 현명하였고 연기력도 탁월하였으며 담대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형제가 싸우다 형이 동생을 죽였는데 친척들이 살인자인 형도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나를 핍박한다. 형이 비록 살인자이긴 하지만, 그 아들마저 죽으면 난 누굴 보고 살겠느냐? 친척들이 형을 죽이지 못하도록 조처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윗이 그녀의 청을 허락하자 여인은 대담하게 압살롬도 나의 아들처럼 용서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하였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다시 압살롬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지만, 그는 2년 동안 압살롬을 보지 않았다. 이미 암논이 죽은 지 5년이 흘러갔는데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 압살롬을 참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가 남의 문제일 때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의 문제일 때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고방식대로 행동하기는 쉽지만, 하나님의 사고방식대로 행동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견디다 못한 압살롬은 요압 장군에게 다시 한 번 청원해서 아버지와 화해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들 압살롬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에게 용서받고 싶었다. 설령 벌을 받아야 한다면 벌을 받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둘은 입맞춤으로 화해를 하였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삼하14:33)

재미있는 것은 사무엘하 14장 전체에 다윗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를 지칭할 때는 왕으로 표현하였다. 다윗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화해한 것이다.2) 서로 어긋 맞추어 뺨을 대면서 아버지의 눈을 보는 순간 압살롬은 아버지가 진심으로 자기를 용서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사실 용서는 매우 불공평한 것이다. 정의를 이야기하고 법을 따진다면, 잘못한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그런데 그 죄를 덮어버리고 그 사람의 죄책감을 없이 하여 준다면, 그것은 정말 불공평한 것이다. 이것이 상식적인 생각이고, 인간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상식과 합리성을 뛰어넘는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용서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길이다. 복수하려는 마음은 지난 과거의 상처를 계속하여 덧나게 하고 아프게 한다. 그렇게 과거의 틀 안에 갇혀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아픈 마음, 괴로운 마음을 부둥켜 안고서 자신의 인생을 망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용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과거의 아픈 상처에서 자유로움을 얻는 길이다. 그리고 나아가 잘못을 범한 그를 용서함으로 그가 새 출발 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우리의 죄를 응징할 마땅한 권리와 권한을 모두 포기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죄를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죄책을 주님이 다 담당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심으로 우리를 새 사람으로 새 출발 하게 하셨다. 용서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다. 용서는 구원의 도덕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다윗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다윗이 만일 진정으로 용서했더라면, 다윗의 집안에 불어닥칠 피바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압살롬이 새로운 사람으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주(註)

1)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월터 브루그만, 성서유니온선교회, 263쪽 이하

2) 엑스포지멘타리 사무엘하, 송병현, 국제제자훈련원,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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