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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6. 2016

갈릴리는 시골 촌 동네였을까?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처럼 지역 갈등이 심한 나라다. 

혹자들은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을 이룬 때부터 지역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폭정 이후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지역갈등이 시작되었다. 

남쪽은 유다와 베나민 반지파이고 북이스라엘은 나머지 11 지파로 갈라졌다. 

남유다는 땅도 적고 인구도 적었지만,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 하나로 자존심을 세우며 북이스라엘을 멸시하기 일쑤였다. 

(사진 : 임한중 선교사)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라 아예 상종도 안 하고, 갈릴리는 촌것들이라 무시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사건 이후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할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2:7) 

갈릴리 사람들은 후두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끊임없이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1) 

예루살렘 사람들이 볼 때는 갈릴리는 지방이고 시골 무지렁이로 생각하였다. 

(사진 : 임한중 선교사)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방의 갈릴리”라 하였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9:1)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곧 갈릴리 지역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갈릴리 지역이 멸시를 당하였고 이방의 땅이라 하였다. 

북이스라엘은 BC722년 아시리아의 살만에셀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왕하15:29)

아시리아는 갈릴리 사람들을 포함하여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자연히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남유다도 나중에 바빌론에 멸망한 후 모두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디아스포라를 이루었다. 

(사진 : 임한중 선교사)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일단 자유롭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바빌론은 솔로몬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불살라 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잃어버린 그들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자구책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회당이다. 

'회당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단지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에서 시작하였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사실 유대교 신앙의 구심점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그들 곁에 있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늘 우상 숭배에 몰두하였다. 

예루살렘 안에도 온갖 우상들이 가득하였고, 산마다 우상을 섬기는 산당이 있었다. 

그것은 남유다나 북이스라엘 모두 똑같았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형식적이고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책망하였다. 

(사진 : 임한중 선교사) 

놀라운 사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를 빼앗긴 후, 정신을 차린 유대인들은 남자 10명만 모여도 회당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읽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디아스포라의 회당은 이스라엘을 정신 차리게 하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결국,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보다 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이 훨씬 더 훌륭하였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로 돌아왔을 때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다. 

반면에 갈릴리 지역은 마을마다 회당을 세웠다. 

짐작하겠지만, 예루살렘 성전 종교는 빠르게 타락한 반면, 회당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곳은 그래도 유대교를 비교적 잘 유지하였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성전이 있고, 자기들은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갈릴리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였다. 

가이사랴 (사진 : 윤금숙 권사)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갈릴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건 예루살렘의 착각이다. 

갈릴리 지방은 유다보다 훨씬 도시적이고 외부 문화와 접촉이 많았다. 

지정학적으로도 갈릴리 지방은 북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남쪽의 이집트 문명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고대 최고의 문명을 자주 접하므로 이방의 갈릴리란 말을 들었다. 

반면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남유다 도시들은 국제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지방에 있어서 오히려 촌스러웠다. 

나중에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했던 가이사랴와 디베랴를 비롯하여 세포리스, 가이사랴 빌립보 등과 같은 대도시들이 갈릴리 지역에 있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보다 훨씬 고급한 헬라와 로마의 문화를 자주 접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지역에서 자라나셨고 활동하셨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 촌구석이 아니다. 

갈릴리를 무시하지 마라!


주(註)

1) 유대인 스케치, 알프레드 에더스하임, 복있는 사람,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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