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의 재판제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생긴다. 누군가에게 나의 답답한 사정을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라도 내 형편을 안다면 나의 마음을 헤아려 줄 것이란 기대를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약자들의 사정을 잘 살펴주는 분이라면 분명 나를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장자는 동생보다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신21:17) 그런데 그의 형은 두배가 아니라 전부를 가지려 하였다. 이는 명백히 율법을 어긴 것이기에 동생은 억울함을 느꼈다.
구약시대에 어느 도성에서든지 법적인 문제는 장로들이 관할하고 판결하였다. 장로들은 씨족 사회에서 최고의 우두머리요,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그들은 성문에 앉아서 그 성안의 모든 일들을 재판하였다.
신명기에서 이들을 성문의 장로들이라고 불렀다.(신21:19, 22:15, 룻4:2)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수20:4)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정식 재판관이 등장하였다.
문제는 불의한 재판관들이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미가3:11)"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이사야 5:23)
예언자들은 불공정한 재판에 대하여 강력하게 항의하며 바르게 재판할 것을 촉구하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에게 재판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 되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의 전문가인 랍비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보다 일반 백성의 재판관 되기를 훨씬 좋아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행태를 보이는 랍비들을 꼬집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으로 좋아하느니라.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마태복음23:7,8)
그런데 이 사람이 회당의 장로나 랍비를 찾지 않고 예수님을 찾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랍비나 장로들보다 예수님이 훨씬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 줄 것으로 기대했다. 모르긴 몰라도 제 딴에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나와 가까운 사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의 사정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지만, 때때로 나에게 곤란한 요구를 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자기 남편에게 혹은 자기 자녀에게 직접 충고를 해달라는 요청이다. 그런 경우 나는 무척 곤란한 지경에 빠진다. 나는 상담자는 될 수 있어도 재판관은 될수 없으며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으므로 나는 회피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경우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예수님께서 분명 그 사람의 이름을 아셨을테지만, 굳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 사람아!"
중동에서 이런 호칭은 사람을 퉁명스럽게 부르는 방법이다. 예수님이 재판받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베드로보고 “너도 그 도당이라.”하였다. 궁지에 몰린 베드로는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눅22:58)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문하는 사람을 향하여 “이 사람아!”라고 하였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9:20)
예수님도 그를 친구로 부르지 않고 마치 제3자를 대하듯이 객관적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말 한 마디에 예수님의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보이셨다. '나는 너희 싸움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며, 너의 편에 서지도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요7:24)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 편에 서기가 쉬운 법이다. 말로는 공정하게 한다 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 판단할 때가 너무 많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파당이 생겨난다.
대개 사람들이 싸우는 문제를 살펴보면 세상적인 문제, 물질적인 문제, 감정적인 문제, 육체적인 문제들이다. 영원을 바라보며 영혼 구원을 마음에 두고 계신 예수님이 보실 때 그런 문제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땅의 문제에 목숨 걸고 싸울 때가 참 많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제 곧 얽히고설킨 이 세상을 떠날 터인데,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세웠던 대의명분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될 터인데. 자기감정이나 뜻은 숨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한다는 명분만 내세웠던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실 터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남을 올무로 잡듯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느니라”(사29:21)
예수님은 Peacemaker로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하여 오셨다. (엡2:14)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몰라서 이렇게 냉정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실 누가 나에게 판단해 주기를 원한다면, 그가 나를 권위자로 인정한다는 뜻이고, 그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 편에 설려는 심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의라는 이름으로 서로 분쟁하고 싸우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 되고 사랑하게 하려고 오셨다.
판단자는 오직 한 분이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2)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약4:11)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다.(마5:9) 의의 열매는 공정한 판단과 편가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평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약3:18) 화평케 할 자가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분쟁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면, 예수님은 결코 그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신다.
"야! 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