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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10. 2016

본투비블루(Born to be blue)

부조리한 현실에 부조리한 인간 쳇 베이커(Chet Baker)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고 알려진 쳇 베이커(Chet Baker, 1929-1988)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본투비블루(born to be blue)를 보았다. 캐나다 출신 영화감독 로버트 뷔드로(Robert Budreau, 1974~)는 이 영화를 제작함에 사실을 추구하기보다는 각색을 통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전기 영화가 아닌 음악 드라마라고 해야 맞을듯싶다.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제인도 가상인물이고, 영화 속 사건들도 많은 부분을 가상하여 만든 사건이다. 영화는 1959년 마약 소지혐의로 이탈리아에 수감되었던 쳇 베이커가 돈을 써서 출소한 후 자전적 영화에 출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스토리는 이러하다. 마약에 찌들어 살던 쳇 베이커가 제인이라는 무명 여배우를 만나면서 재기의 길을 걷는다. 막 재기에 성공하는 듯하였지만, 196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한다. 그리고 트럼펫 주자로서는 생명과도 같은 앞니가 다 빠져버린다. 이제 연주자로서 생명은 끝나고 오랫동안 함께 한 친구 딕(Dick)도 떠나버린다. 그러나 제인 만은 그의 곁에 남아 헌신적인 사랑을 쏟으며 그의 재기를 돕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토록 바라던 복귀 무대인 버드랜드에서 그만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만다. 사랑하는 여인 제인은 그의 곁을 떠나고 그는 유럽으로 이주하여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1. 마약 없이 음악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당시 재즈 연주자들 대부분은 마약에 중독된 자들이다. 즉흥 연주인 재즈의 특성상, 다들 약의 힘을 빌지 않고선 신들린 연주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음악적 스승인 찰리 파커(Charlie Parker, 1920~1955) 역시 술과 마약을 손에서 놓지 못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는 아주 깔끔한 이미지로 나오는 그의 음악적 라이벌인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 역시 외로움과 두려움을 마약에 의존하였다.


그는 마약을 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Hello, fear. Hello, death. Fuck you.” 쳇은 인기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마약으로 풀려고 하였다. 사랑하는 여자 제인이 그의 곁에 서서 끊임없이 격려하고 지지할 때는 마약을 멀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복귀가 걸린 주요한 무대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의지하기보다 마약에 의지한다. 결국, 그의 인생은 마약으로 망쳐지게 된다. 영화에서는 사랑하고 지지해주던 제인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비참하였다.

1988년 5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공연장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던 그는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다. 50대의 쳇 베이커는 오랜 약물중독과 술 담배에 쩔어 70대 노인의 모습이 되었다. 경비원은 그를 모욕적으로 대했고, 연주 시간은 지체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주를 하였지만, 그날 밤 암스테르담의 호텔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2. 끝까지 사랑하고 지지해 줄 수는 없었을까?


비록 가상 인물이긴 하지만 제인은 쳇 베이커가 마약에 손을 댔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의 곁을 떠난다. 감독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 세계에 참사랑은 찾아보기 정말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일까?

사실 쳇은 자기만 생각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음악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마약을 왜 하느냐?”고 물으니까 “그게 날 기분 좋게 하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그런 그의 곁을 지키는 제인은 우리가 꿈꾸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준다. 남녀가 서로 사랑에 불타오를 때는 “생명을 바쳐 영원히 사랑한다.” 고백한다. 그 무엇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연약한지 그들은 아직 잘 모른다. 아주 작은 사건 하나로, 작은 말다툼 하나로 깨어지고 마는 것이 인간의 사랑이란 걸…


제인은 왜 떠난 것일까? 세상 모든 사람이 쳇 베이커에게 등을 돌려도 언제나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었는데… 단 한 번의 실수를 품어줄 수는 없었을까?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상향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3.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생각났다. 그는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에서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한 현실에 과감히 반항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임을 묘사했다. 애써서 언덕 위까지 바위를 어렵게 밀어 올렸지만, 정상에 서는 순간 끝없는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그게 현실이다. 그때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시시포스는 언덕 아래로 터덜터덜 내려간다.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고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지만, 과감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는 행복하다는 것이다.

본 투 비 블루 역시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블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마지막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파란색 조명이 비친다. 블루는 쳇 베이커의 삶을 뜻한다. ‘블루, 색의 역사’를 쓴 미셸 파스투르에 따르면 파란색은 미래, 젊음, 이상 자기 탐구, 정화, 해방을 뜻한다. 블루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고 또한 죽음과 재생의 의미가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애잔한 블루 톤의 재즈 음악이 흐른다. 퇴폐적이면서도 음울한 재즈 음악은 ‘인생이 원래 다 그런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감독은 윤리와 도덕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얻어먹어도 이 부조리한 현실에서 작은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는 것이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허무적 실존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4. 쳇 베이커의 음악은 아름다웠다.


깡패들에게 테러를 당하기 전에 그의 음악은 힘이 있었고 기교도 풍성하였다. 그러나 그가 틀니를 낀 후에는 트럼펫을 전처럼 힘있게 불 수 없었다. 그의 트럼펫 연주는 마치 흘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연주로 변하였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음악적 특징이 되었고, 일반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청년기의 그의 음악은 생기 넘치는 젊은 천재의 음악이었다면, 재기를 거치면서 인생의 쓴맛을 다 겪은 후에는 음악에 그의 인생을 담아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브루스 웨버(Bruce Weber)의 《잊혀져 버리자 Let's Get Lost》라는 계시적인 다큐멘터리에도 출현했다. 그의 인생은 애조띤 재즈 음악처럼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잠시 그의 음악을 들어보자.

my funny valentine

born to be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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