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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30. 2016

믿음이 뭔지 아십니까?

사무엘하 24장

사무엘하 24장을 읽으면, 하나님께 묻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24:1) 사무엘서 저자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다. 하나님이 몹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글을 읽을 때면 몹시 당황스러워진다.


역대기서 저자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나와 같은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본문을 살짝 비틀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역대상21:1) 유진 피터슨은 “다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타올랐다. 그분은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여라”는 말씀으로 다윗을 시험하였다.”로 번역하였다. 모두 사무엘하 24장 1절 말씀을 '어떻게 하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도 속시원하게 본문을 해설하지 못한다.


두 번째 인구 조사는 과연 나쁜 것인가? 출애굽기 30장 12절에 인구조사에 대한 지침을 기록하고 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인두세 : 한 사람 당 2분의 1세겔을 속전으로 성전에 들여 놓게 되어 있음)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인구 조사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세 번째 하나님께서 왜 인구 조사를 핑계로 하여 이스라엘과 다윗을 징계하시려는 것일까? 요세푸스는 자신의 책 '유대고대사'에서 이 부분에 관한 유대인들의 전통적 해석을 소개한다. 다윗이 출애굽기 30장에 규정한 인두세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하였단다.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속 좁은 분으로 해석하는 셈이다. 다른 성경학자들은 인구조사를 하는 다윗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다윗이 교만과 허영심으로 자신의 군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인구 조사의 목적 자체가 군사력을 측정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도 완전하다 할 수 없다. 성경은 다윗의 인구 조사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을 때 사람의 논리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종종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을 설득하라고 요구한다.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는 어거스틴이 말한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를 살짝 비틀어서 해석하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 원하였다.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고,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고, 삶의 의미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이해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초대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는 아주 파격적인 말을 하였다. "Credo Quia Absurdum"(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 그는 믿음에 무슨 이해가 필요하냐? 믿으면 되지. 인문학이고, 철학이고, 논리학이고 세상의 학문은 다 쓰레기처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루살렘과 로마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는 이분법적인 태도를 확실하게 보였다.


원래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주장은 터툴리안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믿음 이후 새로운 이해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즉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논리와 이해를 통하여 믿음이 더욱 자라감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터툴리안의 이원론이나 반문화적 입장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적 인문학과 교양과 문화를 갖추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어거스틴의 말을 풀어쓰면서 이성과 신앙의 완벽한 조화를 꾀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습니다.(Neque enim quaero intelligere ut credam, sed credo ut intelligam)  왜냐하면 저는 '만일 내가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Nisi credidero, non intelligam)'는 것도 또한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무엘하 마지막 장에서 이런 골치아픈 문제를 던지고 있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인구조사를 이유로 다윗과 이스라엘을 징계하신다.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7만 명이 죽는다. 그리고 그 전염병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고 있었다. 그때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한다. 다윗은 갓 선지자의 말 대로 아라우나 타작 마당을 사서 그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의 재앙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멈추었다.


그러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어느 곳인가?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모리아 산이다. 그곳은 후일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세울 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와 실수를 통하여 성전 터를 마련하려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은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하는 아주 중요한 장소다. 사무엘하 24장 처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끝은 아주 선명하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임재를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귀결된다. 아직 다윗이 죽지 않았는데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보다 하나님의 성소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여 여기에서 서둘러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이것이 사무엘서의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결론이다. 그 결론은 선이다. 나는 그 결론을 믿고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 때로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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