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존스 설교 새롭게 읽기
설교는 주고받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로이드존스는 설교 중에 많은 질문을 한다.
비록 설교행위가 일방적이긴 하지만, 로이드존스는 설교 중에 교인들에게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한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원하였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의 심령에 성령님이 역사하기를 소망하였다.
기독교가 전파된 지 이제 2,000년이 훌쩍 지났다.
사람들은 지금의 기독교와 처음 기독교가 별로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처음 기독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처음 기독교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기독교 복음을 믿으면 온갖 불이익과 핍박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면 누가 기독교를 받아들였을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면, 도대체 기독교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그들은 기독교를 믿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은 기득권층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예나 천민이나 여자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미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고난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었다.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없는 최하층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고통과 환난과 아픔은 일상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이고, 인권이 무시되는 사회인 줄 안다면, 이 말씀이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사회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 자들에게 복음은 충격이었다.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노예라도 하나님의 자녀(신의 아들)가 된다.
고통받는 천민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만상형통을 약속하거나,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설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이미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멸시받고, 고난받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때문에 또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어찌 보면 마조히즘 (masochism)처럼 고난을 즐기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복음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
복음은 이 세상이 죄악된 세상이고 덧없는 세상임을 강조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초대교인들에게 이 말은 정말 생생하였다.
그들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다.
처음 그리스도인은 현 세상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하나님의 나라)을 소망하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처음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나라에서 누릴 복을 소망하였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26:29)
그는 죄수였으며 모든 것을 다 박탈당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당당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며 여러분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그는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늘의 영원한 복을 소유한 자였다.
세상과 육체와 마귀와 악한 세력이 바울을 쓰러트리려 총공격을 가하지만, 바울은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그는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아주 넉넉히 이겼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두 발에 차꼬를 찬 채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였는가?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그는 찬송하였다.
야고보는 복음을 전하다 잡혀 바로 목베임을 당하였다.
베드로도 체포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무교절이어서 관례대로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다음 날 집행하려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두 군인으로 베드로를 감시하게 하고 쇠사슬로 묶어놓았다.
베드로는 도망갈 수 없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처형될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천사가 와서 흔들어 깨울때까지 깊은 잠을 잤다.
이런 상황에 잠이 오는가?
베드로는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기대와 소망에 부풀어 있었다.
베드로는 후일 그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베드로와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 그리스도인 모두가 그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환난이 가볍고 잠깐이라고 하였다. (고후4:17)
사람들은 시간을 초, 분, 시, 일, 주, 월, 년으로 센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아주 긴 것처럼 여긴다.
처음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토막 내어 보지 않고 인생 전체를 보았다.
그리고 영원한 세상을 내다보았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들은 인생을 조망하는 영적인 시각을 가졌다.
사람들이 왜 불행하고 절망하는가?
그것은 조급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거야? 도저히 못 참겠어. 이제는 안 되겠다!”
사람들은 늘 신속한 결과를 원한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이 결론 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열매를 거두기를 소망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환난을 이겼다. 넉넉히 이겼다.
환난과 고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때 오히려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천국의 소망이 확고하였다.
오늘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이 세상에서 열매를 거두려고 얼마나 아등바등하는가?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 떵떵거리며 살고자 얼마나 애를 쓰는가?
시간이 짧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조급증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며 살고 있다.
성공 만능주의,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고난받는 것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고난과 시험을 싫어한다. 무서워한다.
처음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망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담대한 믿음과 기개와 정신으로 로마를 굴복시켰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이다.
로이드 존스 "생수로 채우라"의 여덟 번째 설교 '생수로 가득 채운 자는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긴다.'을 읽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