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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29. 2016

아우라 상실의 시대

결혼하고 나서 처남이 다니는 전남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처남은 학교 이곳저곳을 소개해주었다. 그때 한 교실에서 아리따운 여학생이 해금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속된 말로 깽깽이라고 하는 해금은 작은 원형의 울림통과 대를 2개의 줄로 연결한 악기다. 바이올린 활과 비슷하게 생긴 대나무 활대로 앞뒤를 문지르며 소리를 내는 악기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여학생이 우리 앞에서 수줍게 해금을 연주하였다. 고아한 여학생의 가느다란 손을 타고 흘러나오는 애처럽고 애틋한 음색은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해금을 누가 깽깽이라 비아냥거릴 수 있을까! 거의 30년 전 일인데 나는 아직도 해금의 아련한 음색에 사로잡힌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내 눈앞에서 들리던 그 해금 소리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가끔 해금 연주를 들어보지만 두 번 다시 그때 그 감동과 감격을 느낄 수 없었다. 아쉽다. 


2006년 터키를 방문하였다. 터키는 우리나라 남북한 전체를 합한 면적의 7~8배 되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다. 온종일 버스를 타고 가서 딱 한군데 보고 다시 이동하는 여정은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날은 에베소를 가는 도중에 쿠사다시(Kusadasi)라는 항구도시에서 머물게 되었다.   종일 버스를 타고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기에 우리는 모두 녹초가 되었다. 빨리 몸을 씻고 옥상에 있는 식당으로 오라고 하는데 먹는 것도 다 귀찮았다. 온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데 나만 호텔 방에 누워 있자니 미안하기도 해서 지친 몸을 일으켜 겨우 옥상에 올라갔다. 마침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는 시간이었다. 멀리 항구에서는 하얀 크루즈선이 뱃고동을 연신 울려대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바다 위에 하얀 크루즈가 떠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나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2층 방으로 내려가 카메라를 들고 다시 옥상으로 뛰어 올라왔다. 좁은 버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10시간 이상 여행하면서 느꼈던 피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흥분하여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감동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순간을 아우라(Aura)라고 하였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존재하는 한 번뿐인 현상이다. 어느 순간 어떤 풍경이나 음악이 나를 강렬하게 매혹하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단 하나의 오리지널한 순간이다. 눈앞에 사라져가는 하얀 크루즈처럼 아우라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이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다.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음식도 다 식어버렸다. 난 개의치 않았다. 이 아름다운 풍광을 카메라에 담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열어 본 순간 난 크게 실망하였다. 모니터 속의 사진에는 내가 느꼈던 그 감동과 감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서든 볼 수 있음 직한 사진 한 장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벤야민은 이것을 ‘아우라의 상실’이라 불렀다. 차가운 기계가 어찌 사람의 뜨거운 심장이 느낀 감동을 담아낼 수 있을까? 조그만 음악 연습실 내 눈앞에서 들려주던 해금의 소리를 어찌 CD 한 장에 담아낼 수 있을까? 아우라의 상실은 예술의 대중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예술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손 쉽게 음악을 감상하고, 클릭 몇 번으로 아름다운 사진을 살펴본다. 그리고 별 감동 없이 “음! 좋군!” 하며 좋아요 클릭 한번 해주는 것이 전부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하였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초대 교회 교인들도 우리처럼 예수를 보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도들이 전해주는 예수를 듣고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감동하고 감격하였다.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였다. 그들은 전신에 전율을 느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감동하였다. 그들은 기독교가 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느꼈다. 깨달았다. 그리고 헌신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아우라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복제품들이 판을 치면서 진짜 예술품이 가졌던 아우라를 잃어버렸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르미타시 박물관에 가본 적이 있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과 프랑스의 바로크 화가들이 그린 수많은 걸작을 소장하고 있다. 모두가 다 진품이다. 그런데 난 그곳에서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였다. 복제품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 기술이 복제품을 너무 잘 만들어서 마치 진품과 같다. 미술 전문가로서 안목이 없는 평범한 사람은 진품에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를 찾기에 어려움이 크다. 예술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도 그러하다. 대한민국 곳곳에 교회들이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다. TV와 라디오에서 명설교들이 쏟아져 나온다. 매주일 설교를 듣다보니 이제 마음까지 만져주는 감동을 경험하기 쉽지 않다. 삶으로 헌신하게 하는 감동이 있는 예배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온 몸을 전율케 하고 눈물 콧물 쏟게하는 감동의 순간, 말씀의 아우라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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