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gos Brunch Jul 10. 2015

자연이 노래한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독한 소음 공해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변의 소음에 익숙해서 마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 같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온갖 소음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현대 문명은 소음을 끝없이 생산한다. 현대인으로 살아가려면, 귀를 막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결혼해서 첫 신혼집으로 4차선 대로변에 있는 문구점 이층집에 세들어 살았다. 나는 차 지나가는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한 달 동안 소음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정말 괴로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한 달이 지나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 지나가는 소리는 자장가로 바뀌었다. 현대인은 소음에 익숙해져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현대인은 귀를 닫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정말 들어야 할 소리조차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 옛날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레코드도 없고 MP3도 없던 때, 제대로 된 음악을 들으려면, 연주하는 사람을 직접 찾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음악은 부유한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잣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사당패가 동네에 들어올 때야 비로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서민의 음악은 자연의 소리뿐이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 풀 벌레 소리, 바람이 흔드는 낙엽소리, 빗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등이었다. 현대 문명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은 귀를 여는 훈련을 해야 했다. 자연의 소리뿐만 아니라 사람의 소리에도 민감하였다. 표정이 만드는 소리, 몸짓이 만드는 소리, 발걸음 소리, 사립문 여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다. 


명나라 사람 예윤창은 이런 글을 남겼다.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멈추게 하고, 산자락의 폭포는 속기를 씻어준다"


정호승 씨의 "아버지의 나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시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버지가 되어서야 알게 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시속에 담겨 있는 소리들, 우리의 옛 소리가 있다. 강물 소리, 폭포 소리, 종아리 씻는 소리, 아버지의 이름 부르는 소리


성경에 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큰 바람 소리나 지진 소리, 불 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 오히려 세미한 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귀를 막아 버린 현대인에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잘 들리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려면, 먼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약자의 눈물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자연의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것도 아주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데... 


나는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 전에 먼저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은 비소리를 노래했던 Uriah Heep의 Rain을 듣고 싶어지는군요.

http://youtu.be/VrbgbL-iIOY


매거진의 이전글 포카 혼타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