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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ug 30. 2016

참된 우정의 한 모습

“스승과 친구는 하나다.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으면 스승이 아니고, 친구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역시 친구가 아니다.” - 이탁오*


교수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미국 교수 강의 동영상을 강의 시간 내내 보여주다 나갔다. 질문은 받지 않았다. 억지로 질문을 하면 "다음에 답 해줄게." 하고선 대답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교수는 책이나 논문을 가져와 학생에게 한 페이지씩 읽으라고 하였다. 영어 발음에 자신이 없어서인지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영어로 강의하는 국제학부라고 해서 기대하고 들어갔는데 이 모양이었다. 한국 대학의 국제학부를 입학하여 공부한 주애의 경험담이다. 


학생들은 더 가관이었다. 몸이 아파서 하루 결석한 주애가 친구에게 물었다. “어제 숙제가 있었니?” “아니 없었어.” 그러나 숙제는 있었다. “주애야! 노트 좀 보여줄래?” 그리고는 허락도 받지 않고 주애의 노트를 한 장 한 장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친구도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 같지 않았다. 모두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장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적들 같았다. 

한국 대학을 졸업한 후 주애는 독일 뮌스터 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과정 중이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은 20명이다. 대부분 유럽과 미국의 학생이고 일부분이 아프리카와 아시아계 학생이다. 그러니까 서양 학생들이 학풍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함께 공부하는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서로 자기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자발적으로 공개하였다. "얘들아! 나는 이렇게 정리해 보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니?" 매 주일 한 권 이상의 책을 읽고 토론해야 하는 수업이기에 서로 도와가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었다. 서로 파트를 나누어 연구하고 자신이 공부한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나누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로서 자신의 지식과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하나의 팀 같았다. 


교수 역시 전혀 달랐다. 강의와 토론은 언제나 활기찼다. 교수의 강의에 대하여 반론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한국의 교육 풍토와 정 반대였다. 독일 교수는 자신의 이론에 반론하는 학생을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였다. 교수는 마치 친구 같았다. 서로 토론하다 막히면 교수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관련 논문을 더 읽어 오겠다고 하였다. 물론 교수는 그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언제 어디서 어떤 질문이 나와도 교수는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함께 고민하며 풀어갔다. 단지 한 학기를 공부했는데 한국 대학에서 4년간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주애는 드디어 공부다운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물론 1년이 지나면서 몇몇 학생은 따라오지 못하고 포기하였다. 그러나 함께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우정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석사 코스 1년을 마친 주애는 자신이 진정한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깨달았다. 주임 교수는 주애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였다. 다음 학기 대학부 학생들에게 자신의 강의를 맡아 강의하라고 하였다. 석 달간의 긴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에 온 주애는 학교 다닐 때 만큼이나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독일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주애는 강의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 사이 두 개의 논문을 써야 한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지만, 주애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 


외교 사절단의 일행으로 중국에 들어간 홍대용은 1766년 2월 북경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등 중국 선비를 만난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었다. 처음에는 서로 사상이 달라 당황하였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 일색이었다. 주자학은 유학의 한 분파로서 송나라 유학자 주자(주희, 1130-1200)를 교조적으로 따르는 학문이다. 중국에는 공자와 맹자 이외에도 순자, 한비자, 도가, 묵가, 법가 등 수많은 사상이 있다. 그중에서 주자학은 공자와 맹자 사상만 중요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와 맹자를 해석한 수많은 학설 중에 주자의 해석만 받아들여 다른 해석은 사문난적이요 이단이라 비판하고 죽여버렸다. 조선에서 주자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중국은 송, 명, 청을 거쳐 가면서 주자는 일개 사상가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중국의 선비들은 홍대용이 주자를 교주처럼 떠받드는 모습에 당황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주자학은 한물간 학문이고 양명학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1472-1528)의 고향은 항주 근처 여요라는 곳이다. 홍대용이 만난 중국 선비들은 양명학이 특별히 강세를 보이는 항주 출신이었다. 그들의 첫 만남에 나누었을 대화와 어색함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만남이 거듭되면서 홍대용은 마음을 열고 자신이 견지하던 사상과 이념적 태도를 반성하였다. 항주 출신의 중국 선비들도 조선의 편협된 학자의 주장을 크게 나무라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이들 사이의 사상적 교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국에 머무는 2달 동안 일곱 차례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서로 생각의 깊이와 폭이 무한히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하는 것이 같아서 친구가 된 것은 아니다. 다툼이나 갈등 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서로를 성숙시켜 간다는 사실에 친구가 되었다. 1766년 4월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 홍대용은 두 번 다시 중국의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1783년 사망할 때까지 홍대용은 18년을 더 살았다. 그 18년 동안 홍대용은 중국으로 편지를 계속 보냈다. 요즘처럼 우편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기에 보낸 편지의 답장을 받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 이렇게 주고받은 편지로 그들의 우정과 학문은 더욱 깊어 갔다. 불행하게도 엄성은 홍대용과 헤어진 그다음 해 학질에 걸려 죽었다. 엄성은 전에 홍대용이 선물한 조선의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반정균을 통해 그 소식을 들은 홍대용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제문을 지어 외교 사절단을 통하여 보내며 엄성의 초상화와 유고집을 부탁하였다. 그의 부탁은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1778년 이덕무가 북경을 다녀오면서 엄성의 유고와 초상화를 받아왔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동서고금 학자들의 우정은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사상을 나누고 서로의 발전과 성숙을 꾀하였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며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와 옥스퍼드의 언어학 교수이며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툴킨의 경우도 그러하다. 둘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둘은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릴 때는 항상 마주 보는 모습으로 그리지만, 친구를 그릴 때는 둘이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린다. 


주애는 이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갈 학문적 친구들이 생겼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창조적인 관계가 진정한 우정이다. 답이 같을 필요는 없다. 국경과 민족, 인종과 언어가 달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의 생각과 사상을 나누며 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친구는 없다.  


주(註)

* 공부의 달인 호모 콩푸스, 고미숙 지음, 그린비, 2011년,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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