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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05. 2016

관계와 애정 없이 인식은 없다.

1. 본 것과 못 본 것의 차이

집사람과 데이트할 때다. 생전 유원지나 관광지를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집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큰맘 먹고 월미도에 갔다. 해안가 제방을 따라 횟집과 찻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가게마다 호객하는 아주머니들이 나 같은 얼치기 손님을 잡아채려고 안달복달하였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내 돈 내고 뭘 사 먹어 본 적이 없던 나는 큰맘 먹고 집사람에게 말을 하였다. “뭐 드실래요?” “여기 왔으니 회를 먹어야 하지 않나요?” 사실 난 그때까지 회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회가 얼마나 할까? 그리고 내가 회를 먹을 수 있을까?' 지금은 고쳤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지독한 편식을 하였다.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국에 파가 들어가면 파를 다 건져내고 먹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고자 용기 있게 횟집에 들어갔다. 집사람은 아나고 회를 주문하였다.  아나고는 바다에 서식하는 붕장어로 뱀장어목에 속하는 물고기다. 집사람도 회를 떠놓은 붕장어는 먹어봤지만, 살아있는 붕장어를 본 적은 없었다. 횟집 주인은 붕장어가 얼마나 싱싱한지 보여줄 요량으로 우리 앞에 커다란 뱀과 같이 생긴 장어를 들고 와서 머리에 못을 탁 박고 칼로 장어를 죽 훑어 내려갔다. 탁탁 회를 쳐서 우리 앞에 놓았는데 장어는 아직도 꿈틀꿈틀하였다. 집사람은 눈앞에서 살아있는 장어를 회쳐서 내 놓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나도 충격을 받긴 했지만,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날 집사람은 징그럽다고 회를 먹지 않았다. 나는 돈이 아까워서 울며 겨자 먹기로 회를 한 점 들어 초고추장을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뼈까지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게 맛은 나름 괜찮았다. 그날 난 처음으로 회 한 접시를 다 먹어 치웠다. 


그때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과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회를 먹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할 짓이 아니다. 옛 선비들은 도살장과 푸줏간을 멀리하였다. 도살장에서 들려오는 동물의 비명소리와 푸줏간에 널려있는 시뻘건 동물의 사체를 보고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영복 선생은 그의 책 ‘담론’에서 이양역지(以羊易之)를 풀어가면서 본 것과 못 본 것의 차이를 관계로 설명하였다.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선왕이 종(鐘)을 만드는데 제물로 바칠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소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전후 사정을 들은 제선왕은 소를 풀어주고 대신 양을 잡아 제물로 삼으라 명하였다. 소를 양으로 바꾸라. (以羊易之) 백성들은 제선왕이 소가 비싸니까 소 대신 양을 바치게 했다고 험담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달리 해석하였다. 제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택한 이유는 불쌍한 소를 보았기 때문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만남이고 만남은 곧 관계이다. 관계가 있고 없음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2. 메이관시(méiguānxi, 관계 없다.)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사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것은 없다. 어린 시절 부모와 친근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일평생 관계 맺기를 잘 못 하여 고통을 받는다. 미생이란 드라마에서 중국의 관시(關係)를 거론하는 장면이 나왔다. 흔히 관시를 뇌물로 이해하지만, 진정한 관시(關係)는 오랜 친구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우정을 뜻한다. 중국 사람은 자기와 관계가 없으면 얼어 죽든 굶어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 메이관시(méiguānxi, 관계 없다.)는 남의 일에 쉽사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 중국인의 속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SNS는 우리 주변에 관계에 목마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만, 대부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한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서 누군가 날 알아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없다. 현대 사회는 점점 각박하여 간다. 예전에는 버스나 기차에  노약자석이 없어도 어른들을 위하여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노약자를 위한 지정석을 만들어서 어른 공경을 가르치려 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노인이 자기 앞으로 다가오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자는 척한다. 나와 관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일 시골에서 오시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서울역에 나갔다면 어찌하였을까?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한 자리 마련하여 어머니를 앉게 할 것이다. 어머니와 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3. 관계의 영역을 확장하라.

예수님은 우리의 관계 영역을 확장하라고 권면하였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막12:31) 사람들은 흔히 모르기 때문에 가까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누구도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람을 정말 제대로 알기를 원한다면, 그를 가까이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껍데기 지식일 경우가 많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남들에게 들은 몇 가지 지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한 정보는 그 사람을 진짜 아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대화해야 한다. 


물론 가끔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도 있고, 이상하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기를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였다. 사실 예수님의 명령은 무리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말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다가간다면 관계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원수라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관계를 맺었다면 그다음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관계만 가진다고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다. 형식적인 관계, 의례적인 관계, 기술적이고 방법론적인 관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면 관계 개선 방법론을 논한 책이 많다. 그러나 방법론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일 뿐이다. 진심 없이 그저 방법론으로 다가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면 피곤하고 힘 들 뿐이다. 모든 방법론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 가득 담긴 사랑이다. 애정이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가지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원수를 친구로 삼는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관계의 영역을 확장하여 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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