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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08. 2016

데카르트의 실수

1. 너는 신앙과 학문을 하나로 만들고 있니?

대학 시절, 독일에서 온 교환 학생이 있었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면서 학생들 앞에서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가 독일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장이 연설하였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여러분 교회에 두고 오시오. 이곳은 학문하는 곳이지 신앙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는 학장의 연설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 그가 총신대에서 1년간 공부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신앙과 학문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독일로 돌아가게 되어 무척 기쁘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친구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 친구의 말은 가끔 나에게 질문한다. “너는 신앙과 학문을 하나로 만들고 있니?


사실 이 문제는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학문하는데 이성의 능력은 꼭 필요하다. 이성은 무엇이든 그것을 분석하고 평가하고 검증하려 한다. 그게 설령 신학이든 성경이든 하나님이든 이성은 칼을 들어 해부하고 판단하려 한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이성과 신앙은 미묘한 갈등을 벌일 수밖에 없다.


2. 데카르트 - Cogito ergo sum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발견하고 싶어 했다. 그는 신의 영역은 자기 능력으로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여 논외로 하고 자기가 판단할 수 있는 물질세계에 대해서만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였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확고부동하고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기준을 찾고 싶어 했다. 마침내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생각하는 것이 곧 존재의 근거요 모든 진리의 근본이라고 결론지었다. 생각의 능력, 다른 말로 말하면 이성의 능력은 흔들림없는 기준이고 오류없는 정확한 기준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생각의 힘)으로 이 세상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서양 사상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이제 종교나 도덕에서 진리를 찾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실험하여 분석 평가하고 검토하므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과학에서 발견한 원리야말로 진리라고 믿었다. 수학, 경제학, 사회학, 의학, 역사학 세상의 모든 학문이 저마다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외쳤다. 반면에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정신, 도덕, 종교는 허구라고 선언하였다. 그것은 각자 알아서 자기 취향에 맞게 결정하면 되지 절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진리일 수 없다. 지금까지 정신의 세계는 고상하고 가치있는 진리의 영역이요, 물질세계는 무가치하고 죄된 세계라고 생각했던 이원론이 완전히 뒤집혀졌다.


3. 뒤집혀진 플라톤의 이원론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 즉 정신의 세계는 물질세계보다 실재적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동굴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이 시각, 청각, 촉각으로 아는 세계는 단지 바깥세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 가느다란 햇빛이 들어와 만들어 내는 바깥세계의 그림자가 바로 물질세계다. 그걸 보고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다. 철학자는 그 동굴을 탈출해 바깥세상에 있는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참된 진리는 바깥 세상 곧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데카르트 이후 학자들은 반대로 생각하였다. 이제 그들은 진리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인 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성으로 평가 가능한 것만이 진리이고 이성으로 평가 불가능한 것은 진리의 영역에서 추방하였다. 누가 종교나 도덕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너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였다.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물질세계에서 발견한 것만이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 한 진리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학자들의 주장이다.

4. 진리는 사라지고 영성만 남은 종교

이러한 사상은 종교계 안에도 들어왔다. 독일 교환학생이 다녔던 신학교 학장이 바로 그러하다. 성경을 연구할 때 신앙은 필요 없다. 오직 인간의 이성, 생각하는 힘만 필요하다. 성경은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얼마든지 분석하고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책에 불과하다. 소위 자유주의자는 어떤 특정 신학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성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성경과 신학을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Bultmann, 1905-1990)은 이런 주장을 하였다. 자연 현상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반면에 역사는 자신의 해석이 들어가므로 객관적 관찰이 불가능하다. 그가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예수 그리스도, 역사 속에 기록된 성경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란 존재할 수 없고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주관적 신앙이나 영성만 존재 할 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를 근본부터 뿌리째 뽑아 버렸다. 종교는 철저히 주관적이다.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칼럼니스트 테리 매팅리(Terry Mattingly)는 “오늘날에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모호한 영성은 건전하다고 보지만, 교리적이고 권위적인 종교는 위험하다고 보는 합의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진리 없는 종교는 단지 영성 수련의 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힌두교, 불교, 모슬렘, 기독교, 무속 종교 모두 영성 수련의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든 상관하지 않는 종교 다원주의 사회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아주 너그러운 척 종교에서 무슨 진리를 발견할 수 없지만, 각자 개인이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가지고 영성 수련을 한다면 그 정도는 인정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5. 세상에 무릎꿇은 기독교

이러한 사상은 대중매체를 통해서 급속도로 퍼져갔다. 영성수련의 도구로 전락한 기독교는 세상 앞에 무 꿇었다. 먼저는 신학자들이 그 다음은 일반 그리스도인이 무릎 꿇었다.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하지 세상에서는 필요하지 않다. 신앙은 개인 경건생활에 유익하지 사회생활에는 별로 필요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불신자와 다를바가 없어졌다. 사사시대처럼 각기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객관적인 진리는 없고 다 자기 주관적인 생각만 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원칙과 방법을 따라사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생각이다.


그래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식사할 때 식기도하고, 가끔 틈을 타 "예수 믿으세요." 전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정말 신앙이 뛰어나다 생각하는 사람은 세속의 일은 다 접어버리고 주 앞에 헌신하리라 하며 신학교로 뛰어든다. 그러면 정말 세상의 모든 일은 불신세계에 넘겨주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때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사고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할까? 신앙은 그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일까?


6. 세상을 요동케 하는 그리스도인

초대교회 교인은 세상을 요동케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추종하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혁의 주체였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라는 일차원적인 전도나 모범적인 삶으로 전하는 간접 전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독특한 기독교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가치를 무가치하다 여기고 오히려 영적인 가치에 목숨을 걸었다. 그들의 삶은 신앙과 하나였다. 삶뿐만이 아니라 신앙과 학문, 신앙과 직업, 신앙과 언행 모든 것이 하나였다. 신행일치(信行一致). 신앙과 삶이 하나 될 때 로마는 무릎 꿇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앞에 불신세계는 무릎 꿇었다. 그때 그리스도인은 불과 1%였다. 지금 우리는 25% 그리스도인을 자랑하지만, 그건 단지 숫자일 뿐이다. 세상이 우리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세상의 사고방식 앞에 무릎 꿇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논리, 기독교의 시각, 기독교의 가치를 따라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다.


7. 데카르트의 잘못과 니체

데카르트의 잘못은 이것이다. 이성은 단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일 뿐이지, 그것이 정확하고 틀림없는 절대적 진리를 만드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낸 과학은 끊임없이 뒤엎어지고 있다. 어제의 과학은 오늘의 과학으로 엎어지고 오늘의 과학은 내일의 과학으로 엎어진다. 물질세계에서 발견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늘 엎어지는 것뿐이다.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이성은 지식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수단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 진리는 발견할 수 없다.


니체는 이러한 사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실존적 허무주의를 외쳤다. 그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으로 뭔가를 발견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진리는커녕 추구해야 할 목적도 방향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니체는 보았다. 그런데도 니체는 허무하게 무릎 꿇는 나약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도전적인 허무주의를 외친다. 비록 우리 앞에 허무하고 어두운 심연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도 과감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대답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를 앙다물고 도전하였던 사람이 니체다. 결국, 니체는 그 허무의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미쳐 죽을 수밖에 없었다.


8.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세상 사람은 모두 진리가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래도 진리를 부여잡는 사람이다. 그건 주머니 속에 꼭꼭 숨겨 놓는 진리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갈 때 꺼내 쓰는 진리가 아니다. 그의 삶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진리여야 한다.


성경의 진리가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당신이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속적 가치인가? 기독교적 가치인가?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 -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 무차별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진리를 삶 속에 실천하며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 오늘도 두렵고 떨림 뿐이다.


위의 글은 낸시 피어스가 쓴 '완전한 진리'에 힘입은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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