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도시 이론가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공간을 두 개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지표면 위에 고정된 좌표(경도,위도)를 가지는 절대적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이 묻어 있는 사회적 공간이다. 사회적 공간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공유한다. 지역색은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말한다. 크게 보면 한국인과 일본인과 중국인과 미국인의 사고방식이 다르다. 문화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생각하는 도구인 언어가 달라서도 그럴 수 있다.
정치지리학자인 존 애그뉴(John Agnew)는 여기에 장소감(sense of place)을 덧붙인다. 장소감이란 사람들이 장소에 대해 가지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애착을 의미한다. 고향을 떠난 사람은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어렸을 때 가졌던 짧은 추억이지만, 고향을 향한 애착은 평생 잊을 수 없다. 하물며 자라고 성장해온 장소에 대한 애착과 감정은 떠나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없다.
공간과 장소 그리고 장소감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의미가 조금은 달리 다가온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다.’ 매우 무미건조한 신학적 서술이다. 그런데 이 말에 장소와 장소감을 두고 읽으면 조금 달라진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서 누리셨던 사회적 관계는 무엇일까? 두말 할 것 없이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나누었던 아름다운 교제다. 세상에 진실하고 변함없는 관계가 있을까?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고 2001년 개봉한 ‘봄날은 간다’에서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와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는 사랑을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였다. 총각이었던 상우가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에게 청혼을 하였다. 은수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헤어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여자는 차갑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 수도 없이 약속하고 다짐했던 그 사랑이 변하였다는 사실에 상우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가슴 아픔 대사를 남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세상의 만남과 관계, 사랑과 우정은 모두 변한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의 관계와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다. 완벽하다. 그런 관계를 맺던 장소에서 이 땅에 내려오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심정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장소의 이동(place shift, 내가 만든 말이다.)
그건 단순히 애착 관계의 단절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건 새로운 사회가 가지는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문화와 풍토에 적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 주님께서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의 사고방식에 단 하나라도 동조할 것이 있었을까? 마음 같아서는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싹 쓸어 버리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논리, 사람들이 하는 말 한마디도 귀에 담을 것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통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삼년 동안 가르쳤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 들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자신을 죄 많은 인생과 동일시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와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고, 죄인인 우리의 아픔을 체험하시고 우리를 이해하시고자 몸소 낮아지셨다.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 성육신은 “나도 너희와 같다.” 를 뜻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지 다 알기 원하셨다. 이론이 아니라 육신으로 경험하기를 원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었고, 같이 피곤하였고, 같이 주무셨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손을 잡으셨다.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 위에 계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계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발견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려다보았기 때문이다. 기꺼이 기쁨으로 엎드려 자신의 때 묻은 발을 닦아 주시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예수님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이기려 하고 높아지려 하면서 아둥바둥할 때 예수님은 그들 대신 정죄를 받아 낮고 낮은 모습으로 죽으셨다. 예수님의 자리는 세상에서 제일 밑바닥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가? 우리는 이 땅에 몸 붙여 살면서 이미 성화되고 영화되어 하늘에 올라간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자신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여전히 세상의 죄인이면서, 세상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무리가 있으면, 핏대를 올려가며 정죄한다. 세상과 자신을 동일시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교제하고, 함께 아파하는 일은 없다. 교회는 회원권이 없는 사람은 감히 들어가지도 못할 사교 클럽처럼 변하였다.
강남의 대교회는 문턱이 하도 높아서, 배우지 못한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은 멸시받고 천대받기 일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자신들은 문을 다 열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금새 기가 죽어버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유럽 여행한 이야기를 하고, 자기가 아는 높은 연줄을 은근히 내세우는 이야기에 그만 발걸음을 끊게 된다. 솔직히 대교회만 있는 일은 아니다. 작은 교회, 개척 교회도 언제나 대형교회를 꿈꾼다면 몸짓만 작을 뿐 생각은 똑같다. 교회의 메시지는 '이기자, 높아지자. 승리하자. 축복받자.' 이다. 없는 사람, 약한 사람, 낮은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하는 메시지다. 낮아지기 보다 높아지려 하고, 지기보다 이기려 하고, 죽기보다 살기 원하는 현대 교회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과 정반대 길을 가고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장소 이동(place shift)이 필요하다. 도시 교회가 시골로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소는 공간이 아니라, 사고방식, 삶의 태도, 애착 관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뒤엎어야 한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야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장소(사고방식, 삶의 태도)를 버릴 때 비로소 소망이 있다.
참고도서.
1.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새로운 교회가 온다', 지성근 옮김, (IVP : 서울) 2009년
2. 팀 크레스웰, '장소' 심승희 옮김, ( 시그마프레스 : 서울)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