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에반스(Nicholas Evans)가 써서 영화로 만들어진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가 있다. 영화는 자세한 소개를 하지 않지만, 주인공 몬티 로버츠(로버트 레드포드)는 말을 사육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세대 동안 로버츠 일가는 몬태나 산지를 다니면서 야생마를 잡아 길들여 판매하였다. 너른 들판과 험준한 산지를 마구 뛰어다니는 야생마를 길들이기란 쉽지 않다. 어떤 말은 너무 거칠어서 발굽을 줄로 묶어 다시 목 주위로 돌려매야 할 정도였다. 말을 길들이는 시간은 몇 주가 걸렸고, 그동안 엄청난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어린 로버츠는 야생마를 잔인하게 길들이지 않고 친해질 방법은 없을까 생각했다. 그는 몬태나 산지를 다니면서 어떤 야수라도 무리에서 떨어지면, 인간과 똑같이 외로움에 시달리다 병들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야생 동물이라도 홀로 될 때는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는 야생마를 길들이는 다른 방법을 시험하였다. 그는 채찍과 결박으로 말을 길들이는 대신, 말 우리에 들어가서 가능한 한 말과 대화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진 채 있었다. 그는 말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야생마와 로버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시작하였다. 야생마는 분노와 경계심으로 땅을 내리치고, 뜨거운 콧김을 내뿜고, 우리 안을 엄청난 속력으로 달린다. 로버츠는 그 모습에 개의치 않고 멀리 있었다.
얼마 후 야생마는 지치고, 로버츠는 말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에 안장을 얹고 여유만만하게 말을 탄다.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로버츠는 말한다. “이 동물은 다른 존재와의 접속이 절실하므로, 홀로 남겨지는 것보다 오히려 적과 친구가 되는 편을 선택합니다.” 말의 깊은 갈망을 들을 줄 알았던 로버츠의 새로운 방법을 아버지와 삼촌들은 깡그리 무시했다. 그들은 야생마와 대화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전통을 따라 채찍과 폭력과 결박으로 야생마의 영혼을 뭉개버렸다.
본회퍼는 그의 책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가장 우선적인 섬김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작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듯, 형제를 사랑하는 시작도 그들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경청자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구절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피 소리, 눈물 소리, 신음 소리, 고통 소리, 기도 소리, 억울한 소리,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소리를 들으신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듣는 귀가 열려 있을까? 언제나 그러하듯 현대 세계는 분노와 좌절과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가득하다. 지성과 교양을 자랑하는 현대인의 마음은 영적 갈망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누구를 찾아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까? 아니다. 놀랍게도 저들은 요가나 명상, 불교나 신비 종교,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간다.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 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상담가나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뜻밖에 미신적이고 비논리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제법 많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
미신적인 방법보다 성경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마음의 모든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나오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교회가 점점 비어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존 스토트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중적 귀 기울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세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법은 열심히 배우려고 한다. 큐티, 성경 묵상과 연구, 예배와 기도에 열정을 쏟는다. 하나님 말씀을 알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줄 생각한다. 기독교 서점에 나가면 하나님 말씀을 듣는 법에 대한 책들이 그득하다.
문제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그들의 고민과 아픔과 눈물을 모른 체 한다. 가난하고 굶주린 자, 가지지 못하고 억눌린 자들의 고통의 소리를 외면한다. 성경은 말한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전도사 시절 고등부 학생들이 찾아와 상담하였다. 청소년 시기에 할 법한 이런저런 고민을 늘어놓았다. 나도 청소년 시기를 지나갔기에 대충 아는 이야기였다. 당시 나는 청소년 상담 전문 위원으로 한 단체에서 활동한 덕분에 그들의 말 듣는 훈련이 조금 되어 있었다. 진지하게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표현을 하자 한 학생이 말했다.
“전도사님은 다른 분들과 다른 것 같아요.”
“뭐가 다른데?”
“다른 분은 우리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대뜸 말해요. 너 요즘 성경 보니?”
“아니요”
“성경을 안 읽으니 그 모양이지. 너 기도는 하니?”
“아니요”
“야 가서 기도하고 성경이나 봐!”
“누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싶지 않나요? 마음이 힘들고 괴로우니 못 하는 거지요.”
그렇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만의 아픔, 그만의 눈물, 그만의 사연이 있다. 정답을 모르는 게 아니라 자기의 하소연을 들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성급하게 정답부터 이야기한다. 그들의 상황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마치 설교자가 된 듯 그들 앞에 가상의 연단을 설치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설교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교회 설교자가 하듯 똑같이 설교한다. 세상의 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 그들은 세상과 담을 쌓으면서 복음을 전하며 무조건 들으라고 한다. 마치 몬태나 목장에서 말의 영혼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전통적 방식을 고집했던 로버츠의 아버지와 삼촌들처럼 그렇게 불신자들이 외치는 영혼의 소리에 귀를 막아버린다.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흥미를 잃고 심지어 소외감만 가중된다. 성경은 고리타분한 잔소리이고 나의 사정과 형편은 하나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사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귀를 가지고 들어야 한다.” - 본회퍼
참고도서
1.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새로운 교회가 온다', 지성근 옮김, (IVP : 서울) 2009년
2. 디이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문익환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 서울) 1996년
3. 존 스토트,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한화룡, 정옥배 옮김 (IVP : 서울)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