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바젤(Pascal D. Bazzell) 교수는 1998년부터 OMF 소속 선교사로 필리핀에서 사역하면서 필리핀과 미국 풀러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필리핀 다바오 지역에서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데, 그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읽었다. 성경을 처음 읽는 노숙자들은 성경을 보는 시각이 일반 크리스천과 전혀 달랐다. 파스칼 교수는 그들과 함께 읽은 것을 정리하여 ‘도시 교회학’(Urban Ecclesiology : Gospel of Mark, Familia Dei and a Filipino Community Facing Homelessness)을 출간하였다. 그는 노숙자들과 함께 헤롯의 생일에 헤로디아가 춤춘 사건을(막 6:17-29) 읽었다. 그는 헤롯이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제안 하였을 때, 살로메가 나라나 돈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필리핀 노숙자들은 파스칼 교수의 그러한 태도에 분개하듯 말했다. “당연히 목을 요구하지요. 세례 요한이 가족의 명예를 건드렸잖아요. 비록 헤롯이 자기 동생 부인과 결혼한 것이 부당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비방한 세례 요한은 가족을 욕보인 것이니까요.”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사는 노숙자들이 당연히 돈을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비록 그들이 돈도 없고, 누워 잘 곳도 없는 노숙자이지만, 그들이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마지막 자존심은 명예였다. 그것은 우리도 인간이라는 항변이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척박한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다. 그들 사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경제적 이익보다 인격적인 문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부의 언론인 호딩 카터(Hodding Carter)는 젊은 시절 경험담을 이야기하였다. “주유소 옆에 살던 욱하는 성격의 신사가 살았다. 그는 주유소 주변을 얼쩡거리는 건달들과 손님으로부터 조롱을 당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참을성 없는 성격의 사람이란 사실을 경고하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자신을 우롱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한 명은 죽고 두 명이 크게 다쳤다. 재판이 벌어졌는데 배심원 가운데 유죄를 던진 사람은 호딩 카터 혼자였다. 그때 배심원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가 그 작자들을 쏘지 않았다면 그는 남자 대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Gladwell, 200)
인간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엔 인구기금에 따르면 매년 약 5,000명의 명예살인 희생자가 발생한다. 대부분 아시아와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들은 전통사회를 유지하면서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한다. 서구도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16~18세기 유럽 상류층은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생각되면 목숨을 건 결투를 하였다(Fineman, 57). 현대 서구 사회는 법과 제도를 완비하여 보복과 복수를 금지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명예나 자존심을 건드릴 때 예의를 갖출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1990년대 초반, 미시간 대학의 두 심리학자 도브 코헨(Dov Cohen)과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은 명예 문화와 관련한 실험을 하였다. 그들은 18-20세 된 남자의 가슴을 울컥하게 할 말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좁은 복도에서 어깨가 부딪히는 설정을 한 다음 ‘병신 새끼(asshole)’라는 말을 하고 그에 대한 반응을 조사했다. 도시 문화를 경험한 북부 학생들은 그러한 소리를 들어도 대체로 웃어넘겼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 시골 농촌 문화를 경험한 남부 학생들은 격앙하였다(Gladwell, 201-204).
심리학에서는 분노조절장애를 병으로 취급한다. 흔히 분노는 인간의 모든 정서 가운데 가장 해로운 독소라고 생각한다. 분노는 부도덕하고, 불건전하고, 광적이고, 미숙하고, 원시적이고, 무례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한다(Rubin, 82%). 심리학에서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약물치료를 시행하기도 한다. 종교 단체에서는 영성 훈련이나 마음 챙기기 등으로 분노를 조절하도록 훈련한다.
그렇다면, 분노는 항상 나쁜 것인가? 정신분석가 루빈(Rubin Teodore Isaac)은 분노를 억제하면 다른 정서들도 막히고 결국 폭발하여 예측할 수 없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그는 오히려 분노를 억제하기보다 어떻게 잘 발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라고 충고한다.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 강남순 교수도 분노를 억제할 것이 아니라 배우라고 충고한다. 분노는 파괴적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찰적 분노가 있기 때문이다. 증오, 원한, 복수를 시도하는 파괴적 분노를 멈추고, 어떤 사건이나 행위의 부당함, 불의함, 불공평성을 분석한 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성찰적 분노를 하라는 것이다(강남순, 30%).
분노는 단순한 성격 장애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도록 이어 온 인간의 본질적 정서이다.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자기 방어 전략이기도 하다. 자신의 인격에 침해가 왔다고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방어하려는 것에서 분노, 증오, 보복, 명예살인이 나왔다. 나는 이러한 파괴적 분노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성격 장애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성이며, 가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이제 파괴적인 몸부림을 멈추고 자신을 성찰하고, 상황을 성찰하고, 사회를 성찰하여 분노를 보다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를 소망한다. 그런 면에서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은 불의한 사회에서 고분고분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 분노는 파괴적 분노가 아니라 성찰적 분노다. 성찰적 분노는 타인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자신을 변화시킨다.
Gladwell Malcolm, ‘아웃라이어’(Outliers), 노정태 옮김, 서울 : 김영사, 2010년
Fineman Stephen, ‘복수의 심리학’(Revenge), E-book, 이재경 옮김, 서울 : 반니, 2018년
Rubin Teodore Isaac, 절망이 아닌 선택(Comapssion and Self-hate), 안정효 옮김, 서울 : 나무생각 E-book, 2016년
강남순, ‘정의를 위하여’E-book, 서울 : 동녘, 2016년
Stephane Hessel, 분노하라(Indigenze-Vous!), 임희근 옮김, 서울 : 돌베개,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