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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7. 2016

요셉은 칭찬만 받아야 하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재미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셈족으로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한 민족이다. 그런데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대적하는 관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남쪽의 강대한 제국 이집트와는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솔로몬은 이집트의 공주를 왕비로 모셔서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런데 신명기 저자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애굽으로 돌아가지 마라.’고 명령하고 있다.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경고한다. 물론 이사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의지하려는 모습은 역사 속에 여러 차례 보인다.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사30:7)

“보라 네가(이스라엘이)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36:6)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사31:1)


사실 이스라엘은 나라가 멸망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 역사 속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의 위기감과 절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을 총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창세기부터 열왕기서까지 구약성경의 역사서가 바빌론 포로시기에 정리되고 쓰였음은 구약 학계가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는 민족이 사라지려고 하는 위기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을 재무장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신앙으로 다시 설 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모세 오경을 비롯한 역사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와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고 어떻게 하면 다시금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패망할 때 선지자들이 외친 메시지는 주목할 만 한다. 애굽을 의지하려고 한 이스라엘은 책망의 대상이었다. 민수기 20:15에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우리가 애굽에 오래 거주하였더니 애굽인이 우리 조상들과 우리를 학대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 내려가 종 생활하며 학대받은 원인은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신명기 저자는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원인 제공자 요셉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요셉은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기근에 굶어 죽을 위기에서 구원하여 준 것은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요셉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이해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왔다. 어떤 분은 요셉은 약점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요셉의 약점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창세기를 살펴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여 매우 비옥한 땅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 땅은 기근이 잦은 곳이요 비가 잘 오지 않아 황량한 땅이다. 특히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는 거의 사막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비가 오지 않고 기근이 찾아오면 생존은 큰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집트로 내려가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흉년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이삭을 막으시며 말씀하셨다. “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26:2)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비옥한 땅이 아니라 황폐하고 황량한 가나안 땅에 살도록 요구하셨다. 당장 흉년이 들어 먹고살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매우 고민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비단 먹는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도 언제든 이집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의 도움을 의지하려는 그 모든 시도가 다 헛될 것을 여러 차례 경고하였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이집트의 엄청난 문화와 문명 세계에서 성공한 유일무이한 사람이 바로 요셉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취 지향적 인물임을 그의 꿈을 통하여 잘 보여준다. 그는 12형제 중 11번째로 태어났지만 언제든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했다. 요셉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사실 요셉은 성공을 위한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야곱에게 총애를 받은 것은 그렇다 쳐도, 애굽의 처음 종 생활할 때에도 주인 보디발에게 인정받았고, 감옥에서도 간수장에게, 나중에는 애굽의 바로 왕에게 인정받았다. 그는 윗사람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고 윗사람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매우 성실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을 헤치고 나갈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애굽에 기근이 있을 것을 미리 대비하여 식량 관리를 잘하므로 중근동 지방의 대기근에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거대한 제국 애굽에 엄청난 힘과 재산을 쌓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애굽의 바로 왕으로서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였다. 요셉은 어디를 가던 윗사람에게 총애를 받는 이인자였다. 바로 왕으로서는 그러한 요셉이 사랑스럽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요셉은 이집트식으로 ‘사브낫바네아’라 이름을 바꾸고 이집트의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치장하였다. 그는 버금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그가 지나갈 때는 ‘엎드리라.’ 소리 질렀으며 백성은 그 앞에서 모두 엎드렸다. 그는 이집트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이집트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았다. 말 그대로 요셉은 완벽하게 이집트 사람이었고, 강대한 제국인 이집트에서 최고로 성공한 자가 되었다. 요셉의 이러한 행적은 결코 유대인으로서 칭찬받을만한 행동은 아니다. 성경은 백성을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 버금수레를 타고 가는 권력자의 모습을 칭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첫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다. 므낫세라는 뜻은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다. 그는 정말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잊어버린 듯하다. 일반적으로 성공하거나 높은 지위에 앉으면 고향 사람에게 자신의 성공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 요셉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의 성공 소식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이 굶주려 견딜 수 없어 애굽으로 찾아올 때까지 자기 소식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야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말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이집트의 공식적 통치 철학이었다. 이집트 왕이 자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남길 때 이와 유사한 말을 남겼다. “나는 보리를 생산하고 곡식의 신을 사랑한 왕이었다. 나일 강이 모든 경작지에서 나를 존중하였다. 내가 통치할 때 굶주리거나 목마른 자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룩한 것을 통해 평안히 살았다.” ** 그러니까 형들에게 한 요셉의 말은 어쩌면 사후약방문식 공식적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진정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자였더라면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소식을 미리 알렸어야 했다.


그는 자기 가족을 모두 애굽으로 데려와서 기름진 땅 고센에서 살게 하였다. 고센은 이집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었다. 생각해보라! 거칠고 황무한 곳에서 목축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 했던 야곱의 가족들이다. 이집트에서는 목축은 가장 비천한 직업이요 가증한 것으로 여겼다. (창46:34) 그곳에서 먹을 것이 없고 더는 버틸 수 없어 당대 최고로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애굽 땅에 왔는데 애굽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 고센 땅 -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강남 알토란 같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이집트의 바로는 요셉의 가족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준 셈이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이 약속하여 주신 가난안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야곱은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곳이 고향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할 곳은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떵떵거리며 사는 것은 세상에서는 좋아 보일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하는 땅은 가나안 땅이요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라는 뜻이다. 애굽의 풍요와 문화적 혜택 속에서 유대인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자녀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창50:5) 야곱은 자녀에게 돌아가야 할 곳 가나안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사실 가나안 땅의 흉년이 끝났다면, 야곱의 가족은 당연히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이유는 무엇이며 누구 때문에 돌아가지 못했을까? 그 책임을 요셉이 다 질순 없지만, 그러나 어찌 되었던 지금 이 상황에서 야곱의 가족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자는 요셉이다.


아버지의 유언에 요셉은 당황하였다. 그는 이집트의 바로 왕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의 고민과 갈등을 창세기50:4-5에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로, 제2인자로서 바로 왕의 가장 총애를 받는 신하다. 그런 그가 바로 왕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바로 궁의 사람에게 청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써 바로 왕과 요셉의 관계가 우리 생각처럼 편한 관계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가나안 땅에 장사하고 오겠다는 게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닐 터인데 요셉은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전의 비위를 건드려 본 적이 없는 요셉이었다. 이집트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라고 해도 군소리 없이 순종하였다. 어쩌면 요셉은 애굽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데 익숙하여졌으며 스스로 만족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아버지 유언 때문에 바로 왕의 비위를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을까?


바로 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창50:6-9)

바로 왕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의심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야곱 집안의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는 남겨두고 다녀오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후일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달라고 하였을 때 바로의 타협책이 연상된다. 어린아이는 두고 장정만 가서 하나님을 섬기고 돌아오라. (출10:10-11) 가기는 가되 양 떼나 소 떼는 두고 가라.(출10:24) 애굽의 바로는 모세의 때와 마찬가지로 요셉의 때에도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두려고 하였다. 그는 요셉의 장례 행렬에 병거와 기병을 함께 보냈다. 호위한다는 뜻도 있겠지만,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뜻이 더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셉은 이집트라는 거대 문명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요셉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는 큰 고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 요셉은 과연 칭찬받아 마땅한가? 성경 저자는 노골적으로 요셉을 비난하지는 못해도 요셉으로 인하여 야곱의 온 가족이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에 정착한 것은 명백히 고난의 시작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우리가 애굽에 오래 거주하였더니 애굽인이 우리 조상들과 우리를 학대하였으므로” (민20:5)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에 바빌론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그러하고, 스룹바벨과 에스라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바빌론의 성공적인 삶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들은 비록 황폐하고 다 무너진 이스라엘이지만 끝까지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건을 위하여 열과 성을 다하였다. 바빌론 포로 생활하는 유대인 중에 바빌론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아득바득 힘쓰는 사람들에게 요셉 이야기는 큰 교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성공과 기복신앙에 함몰되어 세상에서 유명해지려고 하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도 교훈이 됨은 분명하다.



주(註)

* 히브리인은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서까지 역사서로 보고 있다.

** Harold Nicolson, Monarchy (London : Weidenfeld & Nicolson, 1962)_ p.20 요람 하조니의 책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162쪽에서 재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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