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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Sep 29. 2016

하나님과 말싸움하기.

“주목!”

선생님은 큰소리로 말했다. 주애는 주먹을 꼭 쥐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주먹을 쥐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변 친구를 둘러 보았는데 아무도 주먹을 쥐지 않았다. 다만 겁에 질린 듯 경직되어 앞에 계신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 한국으로 전학 온 주애는 “주목”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강요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주애는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꼭 물어서 답을 들어야 했다. 혹시 틀린 것이 있으면 자기가 틀린 것인지 선생님이 틀린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 5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 선생님은 영어 동화책을 읽고 번역해 주었다. 자신이 서울대를 나왔다고 언제나 자랑하는 선생님이었다. 신데렐라가 왕궁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을 읽었다. 선생님은 great ball을 큰 공이라고 번역하였다. 주애는 손을 들고 말했다.

“선생님! 그것은 큰 무도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주애는 그 순간 자기가 큰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한국에서는 필리핀과 달리 선생님의 잘못을 지적하면 안 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도 교수에게 묻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다. 4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주애가 깨달은 것은 한 가지였다. 질문하지 말 것. 교수님 말씀은 무조건 따를 것. 수업시간에 조용할 것.


주애는 독일 대학원에 가서야 마음껏 질문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교수에게 반론도 하며 공부다운 공부를 한다고 기뻐한다. 석사 과정 1년을 마치고 이제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2년 차에는 대학부 학생들에게 영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요즘 독일식 토론 수업을 위하여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잘 해내리라 생각한다.

아빠 이제야 비로소 공부하는 것 같아!

비록 자기 의견이 틀리더라도 마음껏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자기의 사고 구조를 더욱 튼튼히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다.

2010년 서울 G20 폐막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 권한을 주었다. 개최국으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준 기회였다. 그러나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오바마는 계속해서 질문할 사람을 찾았다. 그때 중국 기자가 일어나서 한국 기자 대신 자기가 질문하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그래도 한국 기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 정말 어색하고 창피하고 난감한 시간이 흘러갔다.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가 뭐 그런 것을 질문이라고 하느냐 비난받고 눈총받을까 봐 질문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마음속에 독특한 생각이 떠올라도 이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비판하고 트집 잡겠지. ‘중간에 서는 것이 최고야!’ 모두 튀지 않으려고, 눈에 띄지 않으려고 그렇게 숨죽이며 살아간다. 교육부에서 창의력 교육을 아무리 강조해도 이런 상황에서 창의력은 나올 수 없다. 한국에서 진정한 학자가 나올 수 없는 이유다.


요즘 성경을 새롭게 보기라는 주제로 글을 써 올렸다. 전통적인 해석과 생각을 조금 비틀어서 글을 써 보았다. 여기저기서 나에게 말을 한다. 어떤 분은 궁금해서 질문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비웃기도 하고, 어떤 분은 틀렸다고 비난도 하였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선배들이 해석한 대로 무조건 따라 읊조리는 것을 최선이라고 말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 서론 부분만 들으면 오늘 무슨 설교 할는지 다 안다고 한다. 십 년 전 이십 년 전 언제나 똑같은 소리만 하니 졸며 자는 사람이 허다하다. 만일 선배들의 가르침을 앵무새처럼 따라 읊기만 하였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사1:18)

사람이 어찌 하나님과 변론할 수 있을까? 사람의 지식수준, 이해 수준이 어찌 하나님과 변론할 수준이 될 수 있을까?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와서 같이 변론해보자고 말한다.


실지로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과 종종 말싸움을 하였다. 때로 항변도 하고, 하나님에게 대들기도 하였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니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향하여 덤벼드는 인간을 벌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 잘 모르겠니? 우리 한 번 대화해보자. 변론해보자. 너희가 죄로 말미암아 생각이 병들과 사고구조가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나와 대화하다 보면 너희 이해의 눈이 열릴 것이다. 껌껌하고 답답한 너의 이해의 눈이 환하게 열릴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질문하라고 한다. 변론하자고도 한다. 이해 안 되면 말싸움이라도 하자고 한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당신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질문이 없는 것은 호기심이 없는 것이고,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자꾸만 말을 걸고 계신다.


성경은 내게 보물창고와 같다. 때때로 말씀을 읽는 중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라고 했다.**  질문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고, 따르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강의 들을 때는 다 깨달은 것 같지만 돌아서면 잊고 마는 우리다. 내가 몸으로 부딪쳐 깨닫고 감동하고 느끼지 않은 지식은 바람같이 사라진다.


난 사람들이 뭐라 하건 내 능력의 범주 안에서 성경을 비틀어 보려고 한다. 때로 꼬집어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볼 작정이다. 틀리면 고치면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깨달음과 이해의 폭은 점점 커져갈 것이다. 하나님은 질문하는 학생을 좋아하리라 믿는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난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고 싶다. 나의 가슴 속에, 나의 마음속에 성경을 새롭게 보는 통찰력이 끊임없이 솟아나기를 희망한다.


통찰력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한다고 생기지는 않는다. 암송하고 받아 적는다고 통찰력이 생기지 않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조그마한 것이라도 마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40년 이상 매일같이 책을 읽고 공부해도 난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오늘도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 질문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말해준 것을 반복하지 않고 내가 깨닫고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수정할 것이 있거나 고쳐야 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 고칠 생각으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주(註)

* G20 정상회담 후 기자 회견장에서 오바마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기회를 주던 동영상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여덟 단어 /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 11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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