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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21. 2016

감사할 수 없을 때

다니엘

다니엘은 십 대 소년 때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청년이다. 나라는 망하고 성전은 무너져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은 사라졌다.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 우상을 숭배하는 불신 세상에 끌려가면서 다니엘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어떻게 하면 불신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을 목적 삼았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십 대 시절부터 먹는 욕심을 끊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였다. 성경에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구절이 없지만, 다니엘은 최소한 바빌론의 풍요로움과 물질 숭배 사상에 무릎 꿇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포로로 끌려가면서 다니엘은 살고 죽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 같다. 바울이 고백한 바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리라.” 결심하였을 것 같다. 다니엘은 살기 위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출세하기 위하여 왕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니 다니엘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로 다짐하였다.


그가 바빌론의 총리를 하면서 언제나 왕에게 충언하였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한 후에 이렇게 충고하였다.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단4:27) 민주 국가 대통령에게도 직언할 수 없는 세상인데, 전제 국가의 강력한 왕권을 가진 느부갓네살에게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유익만을 추구하는 왕에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라는 말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왕의 말이 곧 법인 세상, 다른 사람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법에 대하여 초월하는 독재자에게 공의를 행하라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직언이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고 살아가는 다니엘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다니엘은 세상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다니엘의 성품과 삶의 모습을 보고 다리오 왕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단6:3) 한글 성경에는 마음이 민첩하다고 번역하므로 오해할 소지가 많다. 민첩하다는 말이 약삭빠르게 권세자의 비위를 맞추고 줄 잘 서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을 보면, 달리 번역하였다.

NIV - Now Daniel so distinguished himself among the administrators

KJV - Then this Daniel was preferred above the presidents and princes, because an excellent spirit was in him;

NIV 성경에는 ‘뛰어나다, 훌륭하다, 고결하다, 다르다.’라는 뜻으로, KJV 성경에는 ‘탁월한 영성’으로 번역하였다. 흔히들 영성 하면 무슨 신령하고 신비한 것을 생각한다. 기도하다 환상을 보거나, 혹은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을 영성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영성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더라는 뜻으로 쓰인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세상을 목적 삼아 살아간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남들 위에 군림하여 유세를 부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조그마한 권세라도 있으면, 그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비록 지금은 권세가 없어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지만, 그의 삶의 목적이 세상이라고 한다면, 그에게 무엇이 주어지든 간에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목적인 세상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


다리오가 나라를 120개로 나누어 고관들과 총리들을 세우면서 혹여나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까 봐 걱정하였다. 어떤 권력이든 그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순간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이 세상 권력의 본성임을 다리오는 잘 알고 있었다. 다리오는 세상 욕심에 사로잡힌 관리들을 통제할 사람으로 다니엘을 총리 위에 총리로 세우려고 하였다. (단6:3) 다니엘은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메대와 파사의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들이 다리오 왕의 인사정책을 알고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다니엘은 근본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름도 없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전쟁 포로 출신으로 지난 일생 바빌론에 충성하며 살아온 자다. 메대와 파사에 사람이 없어 이런 자를 총리 위의 총리로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 명분은 그럴싸하였지만, 실상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데 다니엘이 걸림돌이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그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다니엘을 모함하고 고발할 근거를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다니엘의 사는 방법(life-style)이 그들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목숨 걸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에 그는 세상의 부정함과 부패함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 삼지 않았기 때문에 물질의 유혹 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살고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기에 어떤 세속 권력의 억압 아래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다니엘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건드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다니엘의 신앙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세상의 욕심을 채우고, 부정한 돈을 받아먹기 위해서 다니엘과 같이 청렴한 그리스도인은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들은 왕도 어찌할 수 없는 왕의 규례를 세워 다니엘을 겁박하기로 모의하였다. 30일 동안, 단 30일 동안 오직 왕에게만 기도하고, 만일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 법을 반포하였다. 그들은 다니엘이 단 하루도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지 않고 기도할 줄 알고 있었다. 과연 그들의 예측대로 다니엘은 왕의 조서에 어인(御印)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무어라 기도하였을까? 이 위기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하였을까? 이 모든 문제를 속히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였을까?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주변의 모든 동료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모두 다니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면서 “혼자 잘난 척 깨끗한 척 의로운 척하면 다냐!” 비웃고 조롱하는 소리를 듣는 상황에서, 이제 곧 사자 굴에 던져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니엘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다니엘의 감사는 도대체 어떤 감사였을까?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바울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 기뻤다. 그는 로또 복권이 당첨된 것으로 기뻐하지 않고, 건강한 것을 기뻐하지 않고, 자신이 괴로움을 받고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였다.


다니엘은 일생 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다니엘은 땅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갔다. 그는 자신이 세상(바빌론)을 하나님 나라로 바꿀 힘과 권세가 없는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신의 힘이 미치는 영역 안에서만큼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며 살고 싶었다. 그는 일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며 이제 그것을 위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였다. 다니엘의 감사 기도를 드리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훼파되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세속 사회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은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다니엘의 삶은 소망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세우려고 할 때 지난 삶을 대충 살펴보고 지명한다. 과거 대법관을 지내면서 공의로운 판결을 하고, 나름대로 흠 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아서 국무총리로 지명하여 인사청문회를 하면, 그의 감추었던 온갖 허물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세상에 어디 좀 깨끗하고 괜찮은 사람이 없을까 찾고 찾던 중에 그리스도인,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총리로 내정하면 다르겠지 하여 총리로 지명한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부정하고 부패한 것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수 믿는 사람도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세상이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지만, 알고 보니 세상의 온갖 욕심으로 때가 잔뜩 묻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세상에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뜻을 순전히 지켜나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일까?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실상 세상의 욕심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들의 부패함보다 훨씬 더 가증스럽다.


오늘 이 시대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은 있을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울면서 찾아 헤매던 의인 한 명은 과연 이 대한민국에 있을까? 세속의 부당한 권세 앞에 생명을 내걸고 저항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없을까? "왕이여 공의를 행하고 가난하고 낮은 자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려 주세요.”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없을까?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유혹하여도 물질 앞에, 돈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청렴한 그리스도인은 없을까? 권세와 지식과 능력을 주면, 그것 가지고 정의롭고 공평하게 모든 사람, 특별히 약자를 보살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어디 있을까? 오늘 이 혼란한 세상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다니엘과 같은 지도자가 아닐까?


이제 누구보다 먼저 기독교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눈물로 회개해야 한다. 나를 비롯하여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였던 모든 지도자가 먼저 무릎 꿇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속의 욕심을 위하여 살아가려고 했던 모든 그리스도인이 엎드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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