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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22. 2016

수치를 아는 지도자

사무엘하 11장

예루살렘은 산 위에 세워진 성이다. 다윗이 세웠던 성은 지금의 예루살렘에 비해 십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작은 성이다. 성안에 사는 사람은 왕의 측근들이었고, 평민은 일반적으로 성 밖에 살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전쟁 때문에 모든 장수와 군인은 전쟁터에 나갔다. 아마도 예루살렘 성 안에 남자는 거의 다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다.


놀랍게도 전쟁터에 나가 군인을 지휘해야 할 다윗은 왕궁에 남아 있었다. 그 소식은 좁은 예루살렘 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왕에 대하여 수군수군거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20) 다윗은 왕 답지 못 하였다.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왕이란 자가 온종일 누워서 빈둥거리다가 저녁 늦게 일어났다. 다윗의 태도는 마치 부하들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하였다. 이는 지도자로서 가지지 말아야 할 부끄러운 태도다.


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에는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어둑어둑해진 왕궁 옥상을 거니는데 한 여인이 벌거벗고 목욕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두워진 저녁 시간에 목욕하려면, 분명히 불을 밝혀야 했을 것이다. 그녀가 유대인의 목욕 규례를 어기고 어두운 저녁 시간에 불을 밝히고 목욕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학생 시절 미팅할 때 조명 아래 앉으라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조명을 받으면 예뻐 보이고, 더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머무는 왕궁 근처에 사는 밧세바가 밤에 불을 밝히고 목욕을 하는 데는 분명 음란한 뜻이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다윗은 밧세바의 유혹에 너무나 쉽게 걸려들었다. 비록 그가 신앙이 있다고 하였지만,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 앞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고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왔다. 그 일은 결코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아의 아내는 왕궁에서 다윗과 함께 하룻밤 또는 며칠 밤을 지낸 뒤에 돌아갔다. 왕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았다. 왕이 한 일이기 때문에 쉬쉬하면서 모른 척 할뿐이었다. 그것은 왕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었다.


서양은 양심의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회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것이 과연 옳은가?”를 따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서양인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쓴다.


반면에 동양은 양심보다는 공동체의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따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동양인은 공동체(사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쓴다. 그들의 결론은 이렇다. 공동체에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죄는 죄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동양사회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모른 척 해준다면, 자신의 명예는 지켜진 것이다.  서양 사람이 볼 때는 뻔뻔스럽겠지만, 그는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만일 우리아의 아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그냥 덮어두고 지나갔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아의 아내는 임신하였다. 다윗 입장에서는 좀 껄끄러운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였다. 만일 우리아가 집에 들어가 밧세바와 잠을 잔다면, 자신의 죄는 가려질 것이고 자신의 명예도 지켜질 것이다. 그런데 좁디좁은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난 다윗의 간음 사건은 이미 다 퍼져 나갔고, 우리아도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아는 다윗의 죄를 덮고, 다윗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왕의 죄를 덮고 자신은 부귀와 명예를 얻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명예는 오히려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수치 거리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우리아는 헷족속으로 고용된 용병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왜 집에 들어가서 자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11:11) 그 말은 지도자인 다윗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마땅히 전쟁터에 나가서 부하들을 이끌어야 할 왕이 오히려 왕궁에서 남의 부인이나 끼고 음란한 짓을 하는 것에 대한 은근한 질책이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 헷 사람 우리아의 이 말은 다윗을 매우 부끄럽게 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다윗은 아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한 개인의 은근한 질책에 흔들릴 다윗이 아니었다. 다윗은 우리아를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자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이기로 하였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삼하11:14) 우리아는 편지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몰랐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아는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였을 것 같다. 왕의 의도를 무시하고 살아남기를 바랬을까? 그는 수치스럽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기로 결심하였는지도 모른다. 다가올 운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남자답게 마주하기로 하였을 것 같다. 


다윗의 편지에는 우리아를 적진 깊숙이 몰아넣어 죽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요압 장군은 다윗 왕의 수치를 가리고 명예를 지켜주려고 부당한 명령에 순종하였다. 우리아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애꿎은 부하 몇 명도 죽었다.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왕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왕의 부끄러운 죄를 쉬쉬하고 왕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다윗의 부하들 모두가 다 공모하였다. 어떤 면에서 다윗은 주범이고, 밧세바는 공범이고, 요압과 예루살렘 성 사람은 모두 종범이다.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었으면, 아마도 다윗은 맘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다윗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아내로 삼았다. 성경 구절 어디에도 다윗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괴로워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명예와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양사회의 특징이다. 공동체에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아닌 사회가 동양사회다.


그들 공동체 모두가 다윗의 죄를 덮어주고 모른 척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 없었다. 죄는 죄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다. 나단 선지자는 양과 소가 많은 부자가 손님 대접한다고 양 한 마리 가진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 부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물었다.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의 대답에 나단 선지자는 크게 소리 질렀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를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느냐!”

모두 알고도 모른 척 하던 왕의 죄가 이제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나단 선지자는 목숨을 내걸고 그의 죄를 공표하였다. 그토록 숨기고 가릴려고 했던 다윗의 죄는 온 세상에 드러났다. 물론 그 전에도 다 알고 있었지만, 왕의 명예를 위하여 억지로 지켜주던 죄악이다.


이제 그 누구도 왕을 지켜줄 수 없게 되었다. 왕의 수치는 왕 이외 그 어떤 사람도 해결할 수 없다. 수치는 그동안 맺었던 공동체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들로부터 손가락질받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죄는 곧 수치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분열이며, 동시에 그가 속한 사회(공동체)와 분열되는 것이다.


다윗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하나님께 용서받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다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수치를 당한 다윗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 앞에 무릎 꿇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시를 지어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다윗의 수치는 그렇게 벗겨졌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사람과의 관계 회복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뻔뻔하고 비열하고 부정하여 도리어 공동체를 공격한다면, 그는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다. 양심이 마비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도 분열한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와 행위, 삶과 율법, 지식과 행위, 이념과 현실, 이성과 감성, 개체와 집단의 분열이다.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고, 정신이 분열된 사람이다.


다윗은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회복된 후 이런 시를 지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참고서적

* 성경과 편견 / 랜돌프 리처즈, 브랜든 오브라이언 공저 / 홍병룡 옮김 / 성서유니온 / 2016년

* 기독교 윤리 /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 손규태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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