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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Nov 25. 2016

역사의 갈림길에서

에스겔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짧은 본문 한 구절에만 집중하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 된다. 성경은 역사적 상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상황을 제일 먼저 살피고, 다음에는 그 본문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열왕기서에 잘 서술하고 있는데 그 중심 주제는 ‘이스라엘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멸망하였는가?’이다. 이스라엘의 멸망 과정에 끊임없이 경고하고 회개를 선포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자라기 시작한 암세포(암의 징후)를 발견하는 단계라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선지자는 암의 단계가 깊어 암세포 제거 수술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단계다. 반면에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는 이제 암 제거 수술의 무용성을 인정하고 사망을 선고하는 단계의 선지자들이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 부활과 회복을 내다본 선지자들이다.*


이스라엘은 왕, 제사장, 선지자 세 직분의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었다. 왕은 다윗 집안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제사장은 사독 집안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지자는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불러 사용하셨다. 물론 정통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게 마련이다. 다윗 집안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여로보암처럼, 사독 집안과 대척점에 서 있던 아비아달 집안이 있었다. 다윗 시대에는 사독과 아비아달 두 집안이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솔로몬이 임금으로 오를 때 사독 집안은 솔로몬 편에 서서 정통성을 확보하였지만, 아비아달은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를 지지하였다가 아나돗으로 유배를 당하고 성전에서 밀려났다. 따라서 아비아달 집안으로 아나돗에서 유배 생활하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다. 그는 오히려 성전 제사 제도의 부패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반면에 에스겔은 사독 집안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제사장 집안의 선지자였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성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 그는 성전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안타까움이 가득하였다. 자기 집안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의 말씀 따라 경건하게 이끌지 못했음을 통탄하면서도 예레미야처럼 신랄하게 비판만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에스겔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간 성전과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는 성전 이야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도 하나님이 영광이 예루살렘의 황금 문을 열고 들어올 날을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에스겔의 한계가 살짝 드러난다. 그는 지나치게 성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가다 보니 매우 보수적이고 국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다윗 왕가의 일원이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할 때 매우 글로벌한 면모를 보였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60:1-4)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사66:18) 이사야는 모든 나라와 언어와 민족이 여호와의 영광 앞에 나아와 무릎 꿇는 것을 보았다.


반면에 에스겔은 국수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겔44:9) 에스겔의 이러한 모습에 성경학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어떤 성경학자는 에스겔이 마지막에 완성될 순결한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 모인 거룩하고 순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나는 이 부분을 경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고 마침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훼파되고 더럽혀지는 과정을 다 보았다. 그는 새롭게 세워질 예루살렘 성전은 순수함과 정결함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과 몸에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이제 두 번 다시 성전에 들어와서 성전을 더럽히는 일은 없기를 소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사야의 비전을 받아들여 계시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계7:9-10)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자칫 보수적인 시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수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히틀러가 성경을 그렇게 해석했고, 미국의 부시가 그러했다. 그들은 성경을 대립 구도에서만 해석하고, 통합이나 포용이라는 측면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과 속을 분리하고, 선과 악을 대립시키며 기독교를 지독한 국수주의 입장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과 속, 선과 악이 뒤엉켜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회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완벽하게 하나님 편에 서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선과 악, 성과 속을 구분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품어 안으시고 통일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이사야나 사도 요한처럼 글로벌한 비전을 가질 수 있다.(엡1:10)


에스겔서는 비교적 단락 나누기가 쉽게 되어 있다.

1-24장 :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말

25-32장 : 이방 민족들을 향한 심판의 말

33-39장 :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말

40-48장 : 새 성전에 대한 환상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에스겔 37장의 말씀은 에스겔서에서 가장 사랑받는 본문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죽음의 골짜기로 인도하였다. 그 골짜기에는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황폐한 땅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마른 뼈들로 가득하였다. 수를 셀 수 없는 뼈들이 있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전쟁의 결과인듯하다. 오랫동안 방치된 뼈들이 있는 그곳은 죽음의 골짜기요 패망의 골짜기였다. 그것은 분명히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고향 땅에 돌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체 그발 강가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마른 뼈와 같았다. 신약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짓궃은 질문을 하신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37:3)

어느 사람이 마른 뼈들을 보면서 다시 살 것을 생각하겠는가? 그렇다고 "이 뼈들을, 이 백성을 살려 주십시요?" 기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대적하여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살려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염치가 있다면, 감히 그런 기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에스겔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회복시켜 달라고,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다. 에스겔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겔33:10) 그러나 하나님의 답은 뜻밖이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겔33:11)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전이요 꿈이다. 소망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악에서 선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에스겔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시작하였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37:4)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37:9) 에스겔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순간 하나님과 에스겔은 하나가 되었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아무런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소망이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마19:26) 하나님과 하나가 된 에스겔의 마음은 뜨거움으로 불타올랐다. 민족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올랐고 회복의 소망으로 가슴이 불타올랐다. 에스겔이 이 메시지를 증거할 때 얼마나 흥분하고 감격하였을까 짐작할 수 있다.


신약의 저자들은 이 말씀을 부활의 메시지로 적용하여 해석하였다. 당시 상황은 어렵고 힘들어 마른 뼈다귀 같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은 궁극적인 승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오늘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세상 사람은 정치적인 상황만 바라보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상황과 도덕적인 상황까지도 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갈팡질팡하겠지만, 촛불의 민심은 현 상황을 멋지게 풀어갈 것이다. 정치적 상황이 풀어지면, 우리의 영적인 상황과 도덕적인 상황도 다 풀어질까?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가 깨끗하고 바른 기독교가 될 것인가? 아무리 바른 정치를 실천하고 경제가 호전된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결국은 망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정치 때문도 아니고 경제 때문이 아니었다. 성전 신앙이 부패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성전 신앙, 하나님 신앙이 회복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의 입술에 담겨 선포된 것처럼, 오늘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해야 할 것이다.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기득권층에 빌붙어서 그들과 함께 호가호위하는 기독교로는 아무 소망이 없다. 역사적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고, 세속의 부패한 자들에게 용서와 평안을 선포한다면, 구약의 거짓 선지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과 다른 상황에 있다. 어찌 보면 에스겔은 희망밖에 볼 것이 없었다. 더는 떨어질 나락이 없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상황 속에서 구원을 보았고 희망을 보았다.


반면에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이냐? 죽음이냐?' 기로에 서 있다. 망할 수도 있고, 다시 회복될 수도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가 볼 것은 희망만이 아니라 저주와 심판도 보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해야 할 기독교가 말씀을 바로 증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계속 부패의 길을 걷고 결국은 나라도 망할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에스겔 시대보다 훨씬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정치나 사회나 경제는 어찌어찌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가 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어야 한다.


주(註)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미래사회 청사진" / 김회권 씀 / 그말씀 2006년 7월호 / 두란노 / 73쪽


에스겔 읽기

1. 기록하지 말고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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