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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l 13. 2015

조선 시대 사랑은 아팠다.

조선 시대 결혼과 사랑

결혼과 사랑은 같이 갈 수 있을까?

조선 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결혼과 사랑을 별개로 생각하였다.

결혼은 소위 정략결혼이었다.

부인을 고를 때는 자기 집안의 품격과 맞는지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얼굴이나 사랑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결혼이란 단지 집안의 품격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그럼 그들에게 사랑은 없었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성들의 이야기였다.

일단 남자들은 첩을 둘 수 있었다.

첩을 고르는 기준은 처를 고르는 기준과 전혀 달랐다.

첩을 둘 때는 정식 혼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그저 자기 마음에 맞으면 데려와 살았다.

하긴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양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여기에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다.

그래서 본처와는 철저하게 예의를 갖추며 매사에 조심하며 행동했지만, 첩과는 마음을 나누는 실질적인 동반자가 되는 때가 더 많았다.


양반 남자들이 사랑을 나눌 대상이 또 하나 있다. 기생이다.

양반들은 임지를 옮겨 다니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지방에 머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 자연스럽게 대하는 여성들이 기생이다.

일반적으로 기생들은 관기들이었고, 그녀들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

양반과 기생의 러브 스토리는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문제는 둘의 러브스토리가 일시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임기가 끝나면 떠나야 하는데 관기들은 소속된 부서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관기들이 임신하여 출산하는 경우다.

당시 피임하는 법을 몰랐기에 생기는 데로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까지 낳으면 그 사랑의 깊이는 더할 나위 없이 깊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제도의 벽은 둘의 관계를 더는 이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의리 있는 양반은 기생의 자녀를 데려다 키워주기도 하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생이 키웠다.

물론 아주 예외적으로 양반 중에 큰 권력을 가진 자라면 기생을 면천시켜 자기의 첩으로 들이는 경우도 있긴 하다.


철저하게 남존여비 사상을 가졌던 조선 시대 사랑은 그렇게 뒤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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