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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18. 2017

현장에 생명바친 사진가

로버트 카파

1947년 로버트 카파(Robert Capa),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데이비드 시무어(David Seymour), 조지 로저(George Rodger)는 국제 자유 보도 사진 작가 그룹 매그넘을 창립하였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그들은 매그넘의 모토를 세 가지로 정하였다. 자율성, 진실성, 인간성이었다. 

자율성은 어느 누구의 사상에 통제받지 않고 각자의 양심과 자율과 창의성에 따라 사진을 찍어야 한다. 진실성은 양심에 반하여 사진을 찍지 않는다. 돈에 굴복하여 마음에도 없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거짓된 사진, 조작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인간성은 사진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매그넘은 회원이 되는 순간부터 모든 이익금을 나눠 갖는 공동 채산제를 채택하였다. 매그넘 회원들은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방법까지 고민하였다.


매그넘의 초대회장은 로버트 카파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유럽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멸시와 차별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욱이 조국 헝가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부침이 있어 결국 고향을 떠나 유랑민처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사진을 배웠지만, 히틀러 치하에서는 살 수 없어 파리로 이사하였다. 너무나 배가 고파 개먹이용 고기를 훔쳐 먹기도 하고 몇 푼씩 구걸하기도 하면서 살았다. 장발에다 남루한 보헤미안이었던 카파는 1934년 파리에서 게르다 타로를 만난다. 그녀는 그의 위대한 사랑이었고 그가 청혼한 유일한 여인이었다. 타로는 거지 같은 차림새의 로버트 카파를 넥타이를 맨 인상적인 인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반파시스트 투쟁을 벌이던 스페인 내전에 사진작가로 참전하였다. 카파는 그곳에서 세계 사진사에 길이 남을 사진을 찍었다. 1936년 9월 코르도바 전선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비탈을 내려오다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공화파 병사의 죽음이었다. 

1936년 9월 23일 사진이 신문에 발표되면서 사진에 대한 의심이 일어났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들어가 찍은 사진을 편안한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였다. 

‘어떻게 비탈을 내려오던 사람이 총탄에 맞았다고 그 순간 뒤로 자빠질 수 있을까?’

‘카파는 어떻게 그렇게 병사를 촬영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을까?’

또 전장에서 병사가 어떻게 그렇게 깨끗한 흰옷을 입고 있을 수 있을까?’

사진을 발표한 신문은 병사의 이름이나 장소를 밝히지 않았다. 의심은 증폭되었다.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는데 사진에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며 수군거렸다. 


소문은 오다우다 갤러거라는 기자의 주장으로 증폭되었다. 1975년 출간한 책에서 자신도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서 로버트 카파와 같이 취재 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카파는 전투가 없어 찍을 사진이 없다고 불평하여 민병대 장교 한 사람이 전투 장면을 위장하도록 제안해서 찍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1987년에는 다시 한번 주장하기를 전투 장면을 연기한 사람은 민병대원이 아니라 프랑코파 군인들이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사진의 제목을 혹자는 ‘왕당파 병사의 죽음’이라 부르고 혹은 ‘공화파 병사의 죽음’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분명하게 공화파인 민병대 측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주 간결하게 답했다. 

“스페인에서는 사진을 찍기 위해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이야말로 가장 좋은 사진이지요.”

그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던 병사들에게 늘 빚진 마음이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는 죽은 병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꼈다. 그는 사진의 진위 논란에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죽어간 병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진실한 사랑이었던 여자친구 게르다 타로를 잃었다. 급히 퇴각하는 탱크에 치여 숨진 것이다. 로버트 카파는 타로를 잃으면서 사랑에 대한 그의 믿음도 사라졌다. 


카파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찍는 4명의 공식 사진작가로 참여하였다. 총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오마하 해변에서 함께 상륙작전을 펼치는 병사들을 찍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보도사진가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가 참여한 전쟁터는 이러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

1938년 중일 전쟁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

1955년 인도차이나 전쟁


그는 전쟁의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전쟁은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혹여 한쪽 편에 편중된 사진을 찍기 쉽다. 로버트 카파는 전쟁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배경일 뿐, 그는 오직 전쟁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 선 인간에게만 집중하였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외식과 가식을 다 벗어버린 진실한 인간성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그러므로 로버트 카파의 전쟁 사진은 단순한 보도 사진이 아니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실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에 대해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당신 사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면, 바싹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보다 한발 앞서 전쟁터에 뛰어들었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주저함 없이 나아갔다. 1954년 5월 25일 프랑스군 호송 부대와 만나 홍 강 삼각주에 위치한 두 요새를 철거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호송대가 길 위에 잠시 멈추었을 때, 카파는 계속 걸어가다가 프랑스군 소대가 수풀 사이로 진군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멈추어 섰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는 베트남 독립군의 지뢰를 밟아 42세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마지막 사진

현장을 생명처럼 여기다 현장에서 생명을 마감한 로버트 카파는 진정한 보도사진가였다. 

책상머리에 앉아 사진 이론이나 떠들어 대는 사람과는 달랐다. 


참고도서

1. D.지라르댕, C.피르케르,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정진국 옮김, (파주 : 미메시스, 2011)

2.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이상미 옮김, (서울 : 시공사, 2016) 

3. 빌프리트 바츠, 클라시커 50 사진가, 최은아 옮김 (서울 : 해냄출판사, 2005) 

4. 육명심, 세계 사진가론, (서울 : 열화당, 1990)

5. 진동선,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이야기, (서울 : 푸른세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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