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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20. 2017

어떤 렌즈를 사용하십니까?

매의 눈과 사슴의 눈

화가는 붓의 차이를 이해하고 어떤 용도에 어떤 붓을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사진가도 자신이 사용하는 렌즈의 차이와 효과를 잘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사진가가 주로 사용하는 렌즈는 표준 렌즈, 망원 렌즈, 광각 렌즈, 접사 렌즈 등이 있다. 흔히들 코가 길게 나오는 망원 렌즈를 끼고 다니면 왠지 전문가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망원 렌즈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망원 렌즈의 효과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망원 렌즈는 앞 뒤 공간을 압축한다.

망원 렌즈는 멀리 있는 피사체를 가까이 당겨서 찍는 만큼 앞뒤 공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렌즈다. 망원 렌즈는 프레임 속 요소들 사이의 간격을 극단적으로 가깝게 함으로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 망원 렌즈는 아주 좁은 화각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 요소들을 배제하고 주요 피사체에만 집중한다.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고 피사체만 뚜렷하게 부각하는 효과 때문에 망원렌즈는 인물 사진을 찍을 때 많이 사용한다.

광각 렌즈는 사진 속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반대로 광각렌즈는 원근감을 과장하여 표현한다. 광각렌즈는 프레임을 넓게 잡고 앞뒤 배경을 모두 선명하게 표현한다. 광각렌즈는 사진이 담고 있는 배경을 충분히 담아냄으로 독자에게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광각렌즈의 특징 때문에 사진 속에 마치 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망원 렌즈와 광각 렌즈를 동물의 눈으로 비유하자면 망원 렌즈는 매의 눈으로 비유할 수 있고 광각 렌즈는 사슴의 눈으로 비유할 수 있다. 높은 하늘에서 다람쥐나 작은 동물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매의 눈은 앞으로 모여 있고 날카롭기 그지없다. 매는 다른 것은 보지 않는다. 오직 공격하여 잡아 먹을거리만 관심을 가진다.

사슴은 언제 어디서 사자나 늑대가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주변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전후좌우 사방을 살피기 위하여 눈망울이 크고 눈은 얼굴 양쪽에 위치한다. 사슴의 눈은 공격하기 보다 방어하기 위한 눈이어서 선하고 심지어 눈물이 그렁그렁해 보인다. 전투적인 매의 눈과 달리 사슴의 눈은 평화롭고 수용하는 눈이다.


눈은 예로부터 마음의 창이라고 하여 동양에서는 눈의 모양새에 따라 성격이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관상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눈 모양새는 정말 다양하다. 서글서글하고 큰 눈, 눈을 떴는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작은 눈, 눈꼬리가 길게 올라간 눈, 처진 눈, 눈동자가 작아서 흰자가 많은 눈, 왕눈, 호랑이 눈, 원숭이 눈, 뱀 눈, 거북이 눈 등

눈 모양이 어떠하든 사람 중에는 공격성을 강하게 띠고 있는 매파가 있는가 하면 평화적인 비둘기파도 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사정없이 공격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보아서 말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불렀다.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 버리고 독을 뿜어대는 그들은 정말 무서운 존재다. 그들은 매처럼 오직 한 가지 공격 거리만 본다. 공격 대상을 정하면 그 다음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에게 무슨 허물이 없나? 그가 어떤 율법을 어기나? 그들은 예수님을 공격대상으로 정하고 따라다니면서 물고 뜯고 독을 뿜었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에 정통한 율법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다 율법으로 바꾸고, 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였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면서, 남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은 용서가 없었다. 사도 바울이 선교할 때에도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사도바울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들은 철저하게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오직 율법 하나만 보았다. 그것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만. 그걸 편협이라고 한다.


그는 마치 망원렌즈 하나 밖에 쓸 줄 모르는 사진가와 같다. 공격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데 능숙하지만 남을 포용하고 품어주고 사랑하는 데 미숙하다. 목사들이 모여 회의할 때면 꼭 “법이요!” 외치는 사람을 본다. 물론 법을 지켜야 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 이를테면 절차상의 문제나 형식상의 문제 가지고 물고 뜯는 모습은 정말 눈꼴 사납기 그지없다. 법을 그리 잘 지키는 사람이라면 다른 법도 잘 지키느냐?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남을 비판하고 흠집 내기는 잘하지만, 사랑의 법 은혜의 법은 모르는 듯하다. 문제는 일부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 기독교 전체가 한가지 편협한 렌즈만 가지는 듯해서 안타깝다. 모든 것을 평면적으로 압축해버리고, 오직 한가지 문제에만 집착하는 병이 망원렌즈 병이다.


이 시대 가장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 중 한 명인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대학원 세미나에서 이혼이 항상 나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그는 그때 일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나는 신앙심이 좋은 한 여성의 상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동성애를 감추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치렀기 때문에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남편은 그녀와 전혀 관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관계를 전혀 맺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남자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그녀가 집에 있을 때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섹스를 했습니다. 그녀의 종교적 기준은 “결혼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계속 말했지만, 그녀는 수년 동안 매일 죽음과 같은 고통을 당했습니다.”(은밀한 세계관, 스티브 윌킨스, 마크 샌포드 저, 안종희 옮김, IVP, 112쪽)


윌라드는 깨달았다. 그 어떤 도덕적 규칙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신체적 안전이나 영적 안녕을 무시하고 그저 규칙을 지키는 데만 관심을 가질 때 그는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규칙을 엄격하게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을 원하실까? 아니면 다른 사람, 특별히 비극적 상황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약자들, 병자들, 억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 외국인과 나그네 그들을 헤아려주는 마음을 원하실까?

예수님은 매의 눈이 아니라 사슴의 눈을 가지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보는 커다란 눈망울에 평화를 가득 담고 있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사랑으로 품어 주었고, 온몸에 헌데를 앓아 사람들에게 문둥이라고 버림받는 사람을 안아 주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릎 꿇는 자를 오히려 수제자로 들어 쓰셨다.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찌르고 욕하고 침 뱉고 희롱하는 무리를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였다.


구약 율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이것은 엄격한 법치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와 사랑과 용납과 포용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제정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은혜를 법으로 바꾸지 말고, 법을 은혜로 바꾸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요즘 한국 그리스도인은 무섭다. 글을 조금만 잘못 써도 사납게 덤벼들고 쌍욕을 마구 해댄다. 그리스도인의 눈이 예수님 닮았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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