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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Jun 11. 2017

어떤 사진을 찍으시렵니까?

행복론

영국의 자나 브리스키(Zana Briski, 1966~)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하고 뉴욕 국제 사진센터에서 사진을 공부하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사진을 찍을까를 고민하였다. 사진은 자기 생각과 사상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사진을 배우기 전에 먼저 신학을 공부하였다.

자나 브리스키(Zana Briski, 1966~)

사진을 배운 후, 1997년 그녀는 인도 콜카타 홍등가 성매매 종사자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사진을 찍고자 방문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성매매하는 곳은 범죄의 온상이다. 남자들도 무서워 그곳에 들어가기 두려워하는 데, 백인 여자가 그곳 사진을 찍으려 하는 것은 무모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일 년 동안 홍등가를 찾아갔지만, 사진을 한 장도 찍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캘커타의 홍등가

꾸준하게 찾아오는 그녀를 반겨 맞이한 사람은 아이들이었다. 창녀들이 낳은 아이들이었다.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거리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자나 브리스키에게 다가가 어디서 왔는지,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가 무엇인지 물었다. 순간 그녀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2달러짜리 자동카메라를 사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진 찍는 법은 아주 쉽단다. 그냥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돼.”

아이들은 신기한 장난감을 가진 듯 기뻐하며 집으로 뛰어가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찍어보지 못한 홍등가의 내밀한 삶을 찍었다. 자나 브리스키는 아이들이 가져온 카메라에 매일같이 새로운 필름을 넣어주었다. 일 년 동안 찍은 사진의 양은 엄청났다. 물론 사진 대부분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자나 브리스키는 수많은 사진 중에서 전시할 만한 사진을 골라내었다. 자기가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모두 아이들이 찍은 사진이었다. 뉴욕에서 “Born into brothels”(사창가에서 태어나)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영화감독 로스 카우프만(Ross Kauffman) 역시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나 브리스키에게 사진을 재구성하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꿈꾸는 카메라 : 사창가에서 태어나”였다. 이 영화는 2005년 아카데미우스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받았다. 콜카타 홍등가의 아이들을 돕겠다는 후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백만 달러가 모금되었고 마침내 콜카타 어린이를 위한 사진 학교가 설립되었다. 콜카타뿐만 아니라 하이디, 카이로, 팔레스타인에도 사진학교가 세워졌다.

도대체 어떤 사진이길래 사람들은 그토록 감명을 받았을까?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콜카타는 오래전부터 빈민 문제, 난민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살기 위하여 몸을 팔아야만 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그곳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의 늪이다. 집안에 들어가면 어두컴컴하였다. 매일같이 시끄러운 욕설이 오갔다. 그곳에 무슨 희망이 있고, 꿈이 있겠는가? 아이들이 찍어온 사진 대부분은 어두웠다. 두드려 맞아 피투성이가 된 얼굴 모습의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자나 브리스키는 어두운 사진에 관심이 없었다. 자나 브리스키는 캄캄하고 답답하고 소망 없는 그곳에도 빛이 있고, 웃음이 있고, 희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골라낸 사진은 희망이 담겨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녀는 절망 속에 희망을, 어둠 속에 가느다란 빛을 찾아내었다. 그것이 그녀가 한 일이었다.

사도바울은 말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백대로 정말 궁핍하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이런 고백을 하였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어려운 일을 당하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다. 그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 같은 사람은 바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딤후1:15) 그가 남몰래 흘렸을 눈물을 우리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순전히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바울의 일생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둡고 캄캄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보지 않았다. 절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답답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하였다. 감옥에 갇힌 자신을 염려하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였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2015년 일본에서 드라마로 방송되어 큰 인기를 얻고 영화로까지 제작한 작품이 있다. “내 아내와 결혼해 주세요.(ボクの妻と結婚してください)”이다. 제목만 보면 성인용 영화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용은 매우 감동적이다. 췌장암 말기로 시한부 인생을 판정받은 ‘슈지’는 경력 20년 차 베테랑 방송작가다. 췌장암이란 판정을 받은 그는 치료 대신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한다. 그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아내와 아이를 보살펴 줄 남편을 자신이 직접 골라주어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슈지는 아무리 비극적이고 괴롭고 힘든 일이라도 즐거운 일로 바꾸어 버리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영화는 다소 엉뚱하지만, 결말은 따뜻하였다. 일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언제나 기쁨을 안겨 주었던 남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아내와 아들은 작정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편 앞에서 결혼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한 아내와 아들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결혼식은 모두 가짜였다. 췌장암이란 끔찍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온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눈물을 기쁨으로,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는 영화다.


얼마 전 어머니를 모시고 어느 교우의 집을 방문하였다. 40년 동안 함께 신앙 생활한 몇몇 권사들이 같이 하였다. 거기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한 분 권사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원로 목사님이 뭐 하나 잘못 하시던 거 아셔요? 사모님!”

“알지. 박수를 항상 틀리게 치셨잖아.”

아버지는 박치였다. 그 소리에 모두 깔깔 웃었다. 어머니는 다시 말하였다.

“그래도 노래는 잘하셨잖아.”

“무슨 소리세요. 박치인데 무슨 노래를 잘해요.”

“아니야 ‘허사가(虛事歌)’ 같은 옛날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몰라.”

“난 원로 목사님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도 있지만, 그게 하나도 기억에 안 나.

좋았던 것, 사랑해 주었던 것만 기억나!

지금도 너무 보고 싶어.”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는 참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은 만나면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결론은 언제나 누군가를 탓하며 욕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둡고 씁쓸하고 아픈 기억의 사진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생하고 또렷하게 남아있는 그 사진은 그의 인생을 지배한다. 사실 인생은 아프고 힘들고 어둡기 마련이다. 불가에서도 인생은 고해와 같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인생이 광야(사막)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괴롭고 힘들고 답답하고 캄캄한 광야 길을 걸으면서 간간이 체험하였던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간직하였다. 그는 어둠 대신 빛을, 절망 대신 소망을, 고통 대신 찬송을 사진 찍었다. 사도 바울은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후회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사진만 남아 있었다. 사도 바울은 행복하였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십니까?

당신은 오늘 어떤 사진을 찍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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