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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gos Brunch Apr 29. 2017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는 본고사가 있어서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정답을 맞혔어도 문제를 푸는 과정이 틀리면 점수를 받지 못했지요. 반대로 답은 틀렸어도 문제 푸는 과정이 어느 정도 맞았는가 보고 점수를 주었지요. 수학 문제는 언제나 그 문제의 배점이 얼마인지 밝혔었지요. 쉬운 문제는 5점 제일 어려운 문제는 30점짜리도 있었지요.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처음 본 수학 시험은 문제가 달랑 5개뿐이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는 날 고등학교 3학년 선배들이 몽둥이를 들고 우리 반을 찾아왔습니다.

“빵점 짜리 모두 나와!”

“너희가 우리 학교(경복고)를 똥칠하는 놈들이야!”

3학년 선배들은 모두 고교 입시를 통과하여 들어온 수재들이었지만, 우리는 뺑뺑이 세대였기에 실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지요. 무려 43명의 학생이 복도에서 선배들의 몽둥이에 엉덩이를 내밀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전 빵점은 아니어서 매타작은 면할 수 있었지요.


중세 기독교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확실한 정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답은 하나님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교황의 권위는 무소불위였지요. 오직 복종과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은 문예 부흥의 시작을 1417년으로 잡았습니다. 1417년 한 남자가 독일의 수도원에서 먼지 덮인 고서적을 발견합니다. 그 책은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9년~AD 55년)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책이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세상에 대하여 거침없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책을 발견한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가진 영향력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그 책을 필사하고 복간하였습니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정답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문과 함께 인간의 이성은 활발히 움직였습니다. 문예 부흥(Renaissance)은 바로 그렇게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요? 질문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나라인가요? 아니면 무조건 받아 적고 그대로 복종해야 하는 나라인가요? 1912년 4월 14일 절대 침몰하지 않을 거라고 자랑하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습니다. 왜 침몰했을까요? 사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근처 선박들이 여러 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빙산을 조심하십시오!”

“저들이 왜 자꾸 우리에게 경고하지? 빙산이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이러는가? 빙산은 어디에 있나요?”

만약 책임 있는 선원이나 선장이 그러한 경고에 질문을 던졌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필리핀에서 공부하던 둘째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 학교에 간 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주목!"

정신 차리고 집중하여 선생님을 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필리핀에서는 단 한 번도 주목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둘째는 당황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학생이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언제든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물론 선생님 허락은 필요 없었지요. 수업 중에 문제를 풀기 위하여 친구 자리에 가서 함께 의논하는 일도 자연스러웠지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주목!” “집중!” “차렷!” “똑바로 봐!” "조용히 해!" 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주목을 주먹 쥐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주먹을 힘있게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아무도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주목의 뜻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둘째가 한국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것은 간단합니다.

1. 조용히 할 것

2. 선생님 말씀을 잘 들을 것

3. 칠판에 선생님이 써 준 것을 잘 받아 적고 외울 것

4. 질문하지 말것

5. 절대로 선생님에게 자기 생각이나 반대 의견을 말하지 말 것

초등학교 때 받았던 교훈은 대학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조선은 유교 윤리가 정답이었습니다. 어른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해야 했습니다. 소금가마니를 지고 물에 들어가라 해도 어른 말씀이면 순종했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 질문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 낙인 찍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돈(물질)이 정답입니다. 공부 왜 합니까? 결국은 돈 벌기 위함입니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대학에 왜 갑니까? 모든 결론은 돈입니다. 다른 생각이나 다른 의견은 필요 없습니다. 질문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단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아직 중세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기독교는 어떨까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을까? 중세적 기독교의 답은 뜻밖에 간단합니다.

“기도하라! 성경 보라! 감사하라!”

언제나 천편일률적인 정답뿐입니다. 신학교에 가도 정답(교리)만 가르칩니다.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나, 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16세기 루터나 칼빈이 어떤 고민을 하면서 성경을 풀었고, 정답을 찾아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결론만 배웁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치 현대인인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오늘 이 시대로 끌고 옵니다.  루터와 칼빈이 오늘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갔을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 없이 교리를 달달 외우기만 하면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줄 착각합니다.


성경 결코 신학책이 아닙니다. 어떤 학문을 체계적으로 써 놓거나, 요리 문답처럼 질문과 답을 써 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야기로 가득 찬 책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앙생활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다윗 이야기, 요셉 이야기, 베드로 이야기 등이 있는 책입니다. 그가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정답이다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구약 신앙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욥 21:7)

어찌하여 찬송의 성읍, 나의 즐거운 성읍이 버린 것이 되었느냐?” (렘49:25)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 (민11:11)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시44:23)

그들은 때로 하나님께 대들기도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2:1)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박에 노하시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질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질문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편일률적인 답을 주시면서 율법으로 지킬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상황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같이 풀어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답을 안다고 해서 정답대로 살 수 있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문제 풀이 과정에 있습니다. 정답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결론은 이미 났습니다. 다만 그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숙제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바른 질문, 멋있는 질문, 훌륭한 질문도 좋지만 전 가끔 멍청한 질문, 엉뚱한 질문, 말도 안 되는 질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오류투성이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정답만 이야기하는 바리새적 기독교인이 싫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남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답을 찾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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